슬로보단 밀로셰비치(Slobodan Milošević. 1941-2006). 죽은 지 벌써 6년이 지났군요... 시간 참 빨리 가네요.
옛 유고연방 말기에 대통령을 지낸 인물이죠. 유고슬라비아 연방 내 세르비아 공화국 출신입니다. 이 유고라는 나라에 대해서는... 나중에 동유럽 얘기하면서 다시 설명할 기회가 있겠지만, 하나의 민족국가로 묶여본 일이 없는 집단들을 억지로 묶어놓았던 나라라서 이후의 분열상이 너무나도 끔찍한 학살로 이어지게 되지요. 유고의 비극에 대해서는 조 사코의 시사만화 <안전지대 고라즈데>를 초초강추 하고요.
다시 밀로셰비치로 돌아가서- 1989년부터 1997년까지 세 차례 유고연방 내의 공화국 중 하나였던 세르비아 대통령을 지냈고, 동유럽 공산국가들이 스러져 가던 1997년부터 2000년까지는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대통령을 역임했습니다.
유고연방은 여러 민족과 공화국들로 복잡하게 얽혀 있었는데, 유고 건국의 아버지인 요시프 티토(Josip Broz Tito. 1892-1980)가 사망하면서 연방 내 민족들을 묶어주던 유대는 점점 약화됐습니다. 그러다가 세르비아계를 중심으로 자민족 중심주의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밀로셰비치는 1990년 세르비아 사회당(Socijalistička partija Srbije)을 창건, 세르비아 민족주의를 주도했으며 연방 대통령으로 있으면서도 세르비아에 모든 권력을 몰아주는 정책을 펼쳤습니다.
1989년 세르비아 공화국 대통령이 되면서 유고 연방 내 정계에서 두각을 나타낼 때부터 밀로셰비치의 세르비아 중심주의는 그대로 드러났습니다. 세르비아 민족주의를 내세워 연방 내 다른 민족들을 배척할 것임을 분명히 하고 나선 것이죠. 이를 명확히 밝힌 것이 그해 6월의 가지메스탄 연설(Gazimestan Speech)이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치러야할 중요한 전쟁은 경제적·정치적·문화적·사회적인 번영을 이루고 더 빠르고 성공적으로 21세기의 문명으로 가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이 전쟁을 위해서 우리는 영웅적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과거와 종류는 조금 다르겠지만, 진지하고 위대한 용기 없이 아무 것도 성취할 수 없다는 점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그런 용기가 절박하게 필요한 시기입니다."
(마치 히틀러의 연설을 보는 것 같죠?)
"600년 전 세르비아는 코소보의 전장에서 스스로를 지켜냈고 유럽 또한 지켜냈습니다. 세르비아는 당시 유럽의 문화와 종교, 사회 전반을 지키는 보루였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세르비아가 유럽의 부속품인 듯 말하는 것은 온당치 않을뿐더러, 역사적 사실에 어긋나는 정말 어리석은 주장입니다. 세르비아는 예전부터 지금까지 늘 자신만의 방식을 통해 유럽의 일부로 존재해왔습니다. 역사적 관점에서 보아 아무도 그 위엄을 빼앗지 못할 방식으로 말입니다."
가지메스탄은 오늘날의 세르비아 내에 있는 코소보(Kosovo)의 중심지입니다. 1389년과 1448년 두 차례에 걸쳐 세르비아인들과 오스만 투르크 제국 간 전쟁이 벌어진 역사적인 장소랍니다. 이 두 차례 전투에서 약세였던 코소보 군은 오스만 군에 맞서 용감하게 싸웠지만 결국은 패배했습니다.
오랫동안 오스만의 점령통치를 받았던 세르비아인들에게, 코소보 전투는 엄청난 역사적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세르비아인들은 이 전투를 민족적 자긍심의 원천으로 여겨왔습니다. 특히 20세기의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은 이 전투들 덕분에 유럽이 당시 오스만 치하에 들어가는 걸 피할 수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코소보에 대한 세르비아인들의 이런 애착은 이후 코소보 알바니아계의 분리독립 움직임을 억누르고 다시 전쟁을 벌이는 것으로 나타나지요)
밀로셰비치가 이 연설을 한 1989년은 첫 코소보 전투가 벌어진지 600년이 된 해였습니다. 이를 기념해 연설하면서 밀로셰비치는 세르비아 민족주의를 부추긴 겁니다.
오스만 제국 시절을 거치면서도 세르비아계는 정교(Serbian Orthodox)의 전통을 지켰지만, 같은 지역에 공존해온 알바니아계와 보스니아계는 무슬림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밀로셰비치의 자극으로 부추겨진 세르비아 민족주의는 한 지역에서 수백 년을 함께 살아온 알바니아계와 보스니아계에 대한 반감과 증오감정을 자양분으로 삼고 있었습니다.
밀로셰비치의 연설은 '세르비아인이 한 명도 남지 않는다 하더라도 코소보는 영원히 세르비아로 남는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었습니다. 세르비아의 부흥을 노래하던 자들은 환호했습니다. 세르비아의 저명한 학자이자 시인인 마티자 베코비치(Matija Bećković. 1939-)는 가지메스탄 연설에 대해 ‘세르비아 민족주의 혁명의 정점’이라고 평가했습니다. 하지만 이후의 역사가들은 밀로셰비치의 연설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연방공화국의 종말(1991년)과 ‘피의 10년’(유고 내전)의 전조로 평가합니다.
실제로 밀로셰비치의 득세와 함께 유고연방 내에서 세르비아 민족주의가 고조됐습니다. 유고연방 의회는 1990년 해산됐습니다. 코소보의 경우는 특히 상황이 복잡했습니다. 코소보는 유고연방 내 세르비아 공화국(그리고 지금은 독립 공화국이 된 세르비아) 안에 위치하지만 코소보 자체만 놓고 보면 세르비아계보다 알바니아계 주민이 훨씬 많습니다. 세르비아의 자치주 중 하나였던 보이보디나(Vojvodina) 역시 26개 이상의 민족이 거주하던 복잡한 지역이었습니다.
세르비아계는 유고연방이 무력화되자 이들 지역에서 자신들의 세력을 불릴 수 있을 거라고 믿었습니다. 세르비아계가 야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자, 이에 반발을 느낀 유고연방 내의 또 다른 주요 공화국들인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가 1991년 6월 독립을 선언하고 떨어져나갔습니다. 유고연방은 이들 두 독립국과 잇달아 전쟁을 치러야 했습니다. 유고 군의 주축은 세르비아계였습니다. 이어 마케도니아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도 독립을 선언했습니다. 유고연방공화국이라는 이름은 남았지만, 유고연방은 사실상 사라졌습니다.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군이 개입하면서 전쟁은 끝났지만, 유고 내전으로 10만 명 이상이 숨지거나 실종됐습니다. 난민이 200만 명에 이르렀고, 유고 지역의 경제는 붕괴됐습니다. 이 내전을 다룬 기록들을 보면 정말이지 어찌나 끔찍한지... 국제뉴스를 오랫동안 다루면서 가지가지 끔찍한 사건에 대해 읽어봤지만, 제가 생각하기엔 시에라리온-라이베리아 내전 다음으로 끔찍합니다...
1997년 밀로셰비치는 앙상한 골격만 남은 유고슬라비아의 대통령이 됐습니다. 그러자 수도 베오그라드를 비롯한 전국에서 반대 시위가 일어났으며 코소보에서는 알바니아계 주민들과 세르비아계 군 사이에 다시 유혈 충돌이 벌어졌습니다. 세르비아는 유엔 보호 하에 들어갔고, 나토군이 치안유지를 위해 주둔하기 시작했습니다.
밀로셰비치 집권에 반대하는 1996년 세르비아인들의 시위. 사진/위키피디아
2000년 선거에서 패배한 밀로셰비치는 인종말살을 총지휘한 전범(戰犯)으로 체포돼 옛유고연방국제전범재판소(ICTY) 법정에 섰습니다. 그는 코소보,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등 발칸반도에서 벌어진 전쟁과 관련한 범죄, 스레브레니차 인종말살을 비롯한 반인류 범죄 등 66건의 혐의로 기소됐습니다. 하지만 재판이 길게 지속된 탓에 밀로셰비치는 아무런 단죄를 받지 않은 채 2006년 심근경색으로 헤이그에서 숨졌습니다.
2008년에는 밀로셰비치가 유고연방 대통령이던 시절 연방 내 세르비아 대통령을 지냈고 ‘발칸의 도살자’라 불렸던 라도반 카라지치(Radovan Karadžić. 1945-)가 오랜 도피 끝에 체포됐습니다. 2011년에는 마지막 남은 대량학살 주범 라트코 믈라디치가 체포됐습니다.
2003년 유고슬라비아는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국가연합(the State Union of Serbia and Montenegro)’으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한때 ‘세르비아라는 행성의 적도(the equator of the Serb planet)’라고 불렸던 코소보는 2008년 2월 17일 독립을 선언했습니다. 미국 등 서방국들이 코소보 독립을 지지하고 즉시 승인해준 반면 러시아는 변방의 자치공화국들이 덩달아 독립하려 할까봐 전전긍긍하면서(세르비아와 가깝기도 하고요) 반대했습니다. 지금 코소보는 어찌어찌 독립한 나라 취급(?)은 받고 있는 모양입니다만, 앞날은 여전히 미지수입니다.
옛 유고연방에서 벌어진 끔찍한 학살극은 국제사회의 노력 덕에 법의 심판대에 간신히 오르긴 했습니다만 학살자들을 처벌하지도 못했고(적어도 현재까지는) 진상을 투명히 밝히지도 못했습니다. 세르비아라는 나라는 자기네 학살자들 숨겨주기 급급해하는 인상마저 풍깁니다. 실제로 카라지치와 믈라디치가 그렇게 오랜 세월 도망다닐 수 있었던 데에는 누군가의 '비호'가 있었을 거라는 추측이 많습니다.
늘 느끼는 거지만, 역사를 가리고 지우려는 자들의 목소리가 더 큰 사회가 건강하게 발전해가기는 힘든 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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