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네 책방

로버트 카플란, THE COMING ANARCHY

딸기21 2007. 2. 13. 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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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OMING ANARCHY-Shattering the Dreams of the Post Cold War

Robert D. Kaplan. VINTAGE 



미국의 저널리스트 로버트 카플란이 1994년 아틀란틱 먼슬리에 같은 제목의 글을 썼다가 센세이셔널한 반응을 얻었는데, 뒤에 썼던 다른 컬럼들까지 모아서 2000년에 이 책으로 묶어 냈다.

 

냉전 끝났다고 세상의 낙관론자들이 좋아라 날뛰지만 앞으로 다가올 것은 승리의 영광이 아니라 세계의 곳곳에서 독버섯처럼 퍼져나가고 있는 무정부주의적인 분쟁과 폭력이다, 하는 것이 책의 요지다. 아프리카 중동 아시아 동유럽 곳곳에서 민족, 종교의 외피를 쓴 테러범들과 분리주의자들이 일전을 준비하고 있는데 대책 없이 좋다고 떠들지 마라. 


책 제목이기도 한 ‘다가오는 무정부주의’는 이 책의 맨 첫 장에 나와 있다. 두 번째 장에선 무식하고 가난한 민중들에게 형식적인 민주주의(투표)만 가져다주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설파하고, 세 번째 장에서는 대량학살을 이성으로 막아낼 수 있다는 낙관론자들의 주장이 얼마나 철없는 짓인지를 비판한다. 


4장은 냉전 이후에 CIA같은 정보기구를 더 강화해야 하는 이유, 6장은 박애주의자들이 박애만 주장하다 결국 실패하게 된다는 걸 다룬다. 5장, 7장, 8장은 각각 기번 ‘로마제국의 흥망’과 헨리 키신저의 젊은 시절 논문, 조지프 콘라드의 ‘노스트로모’ 소설에 대한 서평이다.


마지막 결론 격인 9장은 평화라는 개념이 얼마나 허약한 것인지 평화주의자들에게 따지며 환상을 깨라고 충고하는 것으로 끝난다. 재미는 있지만 어쩐지 올해 첫 책으로 하기 싫어서 1년 내내 강독한답시고 읽다가 석장 남겨놓고 또 미뤄뒀다. 결국 동방견문록을 다 읽고 나서 마지막 남은 여섯 페이지를 넘겼다. 

 

실은 토머스 프리드먼의 ‘세계는 평평하다’를 동시에 읽고 있었다. 몇해전 카플란의 ‘타타르로 가는 길’을 읽고 나서도 프리드먼과 카플란을 비교하는 독후감을 썼었는데, 공교롭게도 또 비교를 피하기 힘들게 됐다. 


국제정치 어쩌구 하면 현실주의/이상주의 이런 구분을 접하지 않을 도리가 없는데, 카플란은 현실주의 중에서도 수퍼울트라 현실주의다. 문체는 시니컬, 시선은 차갑고, 묘사는 처참하고, 진단은 냉혹하고, 처방은 극단적이라 할 정도로 ‘현실주의적’이다. 평화를 사랑한다고 목소리 높여 외치는 이들이여, 평화를 사랑하는 것으로 평화를 가져올 순 없다, 저 아프리카의 못나터지고 무능하고 잔혹한 작자들을 보아라, 저 동유럽의 걸레 같은 도시들을 보아라, 이슬람의 형편없는 테러리스트들을 보아라! 미국의 힘으로, 강대국들의 힘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것이 가난한 제3세계 민중들에겐 차라리 나을 것이다 - 표현은 좀 다르지만, 이렇게 표현해도 카플란이 별로 반박은 안 할 게다. 


프리드먼은 기본적으로 낙관주의자, 이상주의자다. 9·11 테러 뒤 맛이 확 가버리긴 했지만 그의 시선은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옳고 그르고를 떠나 그의 시선은 따뜻하다. 너무나 미국적인 희망의 메시지가 둥둥 떠다니다 못해 세상을 평평히 누른다고까지 하니 압박스러울 지경이다. 

 

프리드먼은 카플란보다 유명하다. 돈도 더 많이 벌 것이다. 사람들은 낙관적인 이야기를 좋아한다? 어쩜 그런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대중적인 인지도 혹은 저술가로서의 인기 면에서 보자면 프리드먼은 저널리즘의 스타이고, 카플란은 황야의 선지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카플란의 말마따나 미국에서 이상주의자들이 외교를 맡았던 적은 없었다! 민주당 정권 때 국무장관을 한 매들린 올브라이트가 헨리 키신저보다 순진했을는지는 몰라도, 이상주의는 아니었다. 학자들과 (뉴욕타임스 같은) 언론은 이상주의를 떠들어대지만 미 백악관과 국무부는 언제나 현실주의자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정치와 외교는 현실이니까. 카플란과 정반대편에 서있는 촘스키 같은 사람들도 맞다고 할 것 같다. 


프리드먼은 오만하고, 카플란은 잔인하다. 이 두 사람을 굳이 이야기하는 것은 잘나가는 저널리스트들로서 미국의 두 시각을 보여준다는 점 때문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이들의 시각이 세상을 보는 두 가지 방법을 대변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세상은 평화롭다-위험하다’ ‘세상은 평화로워야 한다-평화는 주의주장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협상과 대화가 중요하다-협상과 대화는 비효율적일 때가 많다’ ‘글로벌화는 번영을 갖다준다-그 번영을 깨려는 자들이 더 많아진다’ ‘미국식 가치는 선하다-그거 싫어하는 자들도 많다’ ‘착한 사람이 승리한다-착한 것은 승리와 관계 없다’ 등등. 


프리드먼은 독자들 혹하게 글을 쓰긴 하는데 통찰력이 없다. 뉴욕타임스 국제문제 전문기자라는 문패 값이 더 높다고 본다. 혹평을 하자면 그 정도 배우고 그 정도 돌아다니면서도 그렇게 통찰력 없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다. 머리가 나쁘다고 할밖엔. 카피를 만드는 것도 영 그저 그런데 억지로 밀어붙이는 느낌이다. 렉서스와 올리브나무, 경도와 태도, 월드 이즈 플랫(The World Is Flat) 이라니. 


카플란은 잔인한데 그가 묘사하는 것은 ‘현실’이다. 조지 W 부시가 이 자의 책을 보고 전쟁구상을 했다는 믿거나 말거나 소문이 있지만, 부시 류의 기독교 근본주의와 카플란이 주창하는 ‘강자(强者)의 현실주의’는 맥락이 좀 다르다. 


나는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행여라도 이상주의-현실주의라는 기준으로 사람을 가를 때 내가 후자의 편에 들어갈 것이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사필귀정, 권선징악, 세상은 착한이들의 것이며 인간에겐 이성과 양심을 기대할 수 있다, 가난하고 억눌린 이들은 도와야 하고 법과 정의가 승리할 것이다. 나는 계몽주의 이상주의 이런 것 굳이 얘기하지 않더라도, 이성의 힘과 역사의 진보를 믿는다! 그런데 갈수록 현실주의 쪽에 귀가 솔깃해지려는 나를 발견하니 당혹스럽다. 카플란이 말하는 것은 ‘진리’는 아닐지언정 적어도 ‘현실’ 혹은 ‘현실의 한 단면’이니 말이다. 


일례로, 아프리카를 볼 때 가장 난감한 것이 개발독재 문제다. 개발독재는 필요한가? 쉽게 말하기 힘든 것들, 더군다나 박정희의 그림자가 여전히 드리워져 있는 한국사회에서 태어나 자란 내가 뭐라 단언하기 힘든 유령 같은 문제들과 부딪칠 때마다 혼란스럽다. 자유, 평화, 민주주의, 인권, 평등, 정의, 테러, 분배, 유엔, 국제기구, 효율성, 자선과 구호. 


“세계무역 확대, 인간의 창의성 같은 것들이 세계가 지금 처한 문제들을 해결해주리라고 믿는 기술낙관론자들이 한 무더기 있지만 그따위 것들은 문제가 다 터지고 나서야 뒤늦게 오는 경우가 허다하다.” 


카플란은 프리드먼 같은 한 무더기 낙관주의자들을 싸잡아 평가절하한다. 방금 전 시오노 나나미가 “일본이 60년간 전쟁을 겪지 않아 죽음에 무감각해지다보니 잔혹한 범죄가 많아진다”고 했단다. 이 기사를 보고서 황당해 했는데, 카플란은 조금 다른 맥락에서 ‘60년간의 평화’가 백악관에 철부지들만 들끓게 할 것이라는 주장을 펼친다. 평화의 시대에 태어나 자란 스페셜리스트들의 위기관리 능력을 의심하고 있는 것. 이 부분이 들어가 있는 마지막 챕터의 제목은 ‘평화의 위험성’이다. 카플란이 내던지는 말들엔 동의하고 싶지 않은데, 또 100% 틀렸다 할 수 없는 것이 내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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