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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딸기21 2007. 1. 5. 2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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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마르코 폴로 (지은이) | 김호동 (옮긴이) | 사계절출판사 | 2000-06-27



로버트 카플란의 책이 연말 거의 다 읽고 몇장 안 남은 상태였는데, 그래도 한 해의 첫 시작을 카플란 책으로 하기엔 좀 그렇다 해서 굳이 남겨두고 이 책을 읽었다. 작년부터 읽어야지 했다가 이제야 손에 넣고 책장을 넘겼는데 의외로(아니 어쩌면 예상대로) 재미있어서 깜짝 놀랐다.


서문에서 역주를 단 김호동 서울대 교수가 이 책의 ‘원본’을 충실히 설명해놓았고 각주도 열심히 달아 읽는 데에 많이 도움이 됐다. 베네치아를 영어식으로 베니스라 한 것은 역자가 영어판본을 번역한 탓인 것 같고, 각주에 계속 km가 아닌 마일 단위가 나오는 것도 그 탓인 듯. 이런 책을 애써 펴낸(더불어 이븐 할둔의 ‘역사서설’까지 옮겨냈던) 김호동 교수에겐 박수를 쳐드리고 싶은데, 각주에서 마일 단위 나오는 것과 한자 한글발음 병기 안 한 것 때문에 읽으면서 아주 조금 불편했다. 


원제목은 ‘Divisament dou Monde’ (세계의 서술) 이라 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동방견문록’이라는 터무니없는 이름이 된 것이 지금도 우리에겐 그렇게 인식돼 있다고 한다. 책의 내용을 보면 ‘동방견문록’ 해도 영 틀린 것은 아니지만 원제대로 좀 바로잡을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아예 번역자가 ‘세계의 서술’로 못박아버렸다면 조금은 바로잡기에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역자가 지적한대로, 첫째 유럽인의 눈으로 본 유럽 이외의 모든 세계(유럽인들이 신대륙에 가기 이전)를 담겠다는 것이 저자의 의도였고, 둘째로 ‘동방’이라 하면 중국을 떠올리게 되는데 이 책은 멀리 아프리카 일부지역과 러시아, 북극 가까운 곳까지 포괄하고 있다는 점이다. 


널리 알려진 대로 이 책은 폴로가 감옥에서 구술(口述)했다고 하는데 책의 세세한 부분까지 따지면 진위논쟁이 있는 것들이나 불명확한 부분이 한둘이 아니니 전공자가 아닌 나로서는 그냥 그런가보다 할 따름이다. 구술한 것 치고는 너무 상세하다는 점도 폴로의 정체(?)를 의심하는 학자들 사이에선 하나의 논거가 되었다고 하는데, 어쨌건 이 책의 재미는 바로 그 디테일함에 있는 것 같다.


이 책은 전체가 다 디테일이다 - 대단한 통찰력을 담은 서술이라기보다는, 건조하게 세부사항들을 아주 꼼꼼히 다룬 책이라는 것이 이 책의 미덕이다. 그 중엔 저자가 직접 다녀본 곳에 대한 설명도 있고, 전해들은 것들도 있다. 오늘날의 투르크와 이란, 중앙아시아, 중국 북부와 서남부, 동남부, 인도양 섬들과 인도를 거쳐 소말리아의 모가디슈와 오늘날 탄자니아의 잔지바르(예전엔 ‘인도 영향권’이었고 지금도 그러한) 같은 아프리카 동쪽 해안지대까지, 여러 지방과 도시의 독특한 풍물을 담고 있다.


그런데 수십년에 걸쳐 이 넓은 곳을 다니면서, 언급하는 지역에 대해 짤막짤막하게나마 위치와 거리, 인구, 경제력, 생계 수단(직업), 천연자원과 동식물, 정치구조 같은 것을 빼곡하게 실었다. 구술 형식 탓인지 중세 유럽풍인지는 몰라도 폴로라는 이의 말을 받아적는자가 듣는 이에게 이야기하는 형식으로 돼 있는데, 그렇게 ‘이야기’로 치기엔 너무 방대하고 너무 건조하다. 여행담이라기보다는 지리서나 박물지에 가깝다. 팩트들을 기록해 남기겠다는 의무감과 사명감을 갖고 정리를 해놓은 듯한 분위기마저 풍긴다.


책의 재미는 바로 그런 것들이다. 여러 지역에 대한 폴로의 ‘느낌과 생각’ 같은 것을 찾으려 했는데, 기독교도로서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이슬람(사라센인들)에 대한 비하와 경멸의 표현 같은 구태의연한 것들 말고는, 사적인 감상이 너무 적다. 그 대신 당대의 이방인들 눈에 신기하게 비쳤을 생생한 풍물들이 나와 있어 그걸 보는 재미가 컸다.

바우닥(바그다드)과 바소라(바스라), 이스파안(이스파한), 타우리스(타브리즈), 야스드(야즈드)와 케르만, 소금산과 발크(발흐), 사마르칸(사마르칸드), 탕구트, 카라코롬, 그리고 모게다쇼(모가디슈)와 찬기바르(잔지바르)까지. 


너무나 너무나 가보고 싶은 곳들이어서, 그런 지명들을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서남아시아인들이 말하던 루크(로크) 새 이야기가 여기 나온 것도 반가웠다(이 새에 대해서라면 난 정말 관심이 많은데). 일본 지브리스튜디오의 애니메이션 ‘귀를 기울이면’에 나오는 ‘라피스 라즐리’라는 돌이 이란 북부 바닥샨에서 나는 청금석이란 사실은 처음 알았다.


“조르지아(그루지야)인들과의 경계에 있는 한 샘에서는 100척의 배에 한꺼번에 실을 정도로 엄청난 양의 기름이 뿜어져나오지만 식용으로는 좋지 않다. 그러나 불이 잘 붙고, 가려움병이나 옴이 붙은 낙타에게 발라주면 좋다. 사람들은 아주 멀리서부터 이 기름을 구하기 위해 오고, 근처에 있는 모든 지방들에서도 이것 말고는 결코 다른 기름을 태우지 않는다.” (104쪽)


“카타이 지방 전역에 걸친 산지의 광맥에서 캐낸 검은 돌의 일종이 장작처럼 탄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 돌은 나무보다도 더 잘 탄다. 더구나 여러분에게 말하건대 저녁에 불을 잘 붙여놓으면 이 불은 밤새도록 계속되고 더러는 아침까지 가기도 한다. 장작과 같은 나무도 충분히 있지만, 카타이 전역에서는 이 돌들이 태워지고 있다. 이 돌들은 엄청나게 많은 양이 존재한다. 그들이 이 돌을 때는 이유는 비용이 적게 들고 나무를 많이 절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284쪽)

 

중앙아시아의 석유와 중국의 석탄 이야기. 그 시절부터 그랬었구나 생각해보니 이것도 재미있다. 악어를 보고 ‘입이 엄청나게 큰 무섭고 커다란 뱀’이라 한 것이나 호랑이를 ‘얼룩무늬가 있는 커다란 사자’라고 한 것 등등 웃음 짓게 하는 구절들이 많았다. 암살단(아싸신)을 얘기하는 ‘산상의 노인’ 편은 여러 책에서 접했었지만 여기서 보니 또 재미있다. 용연향 정향 침향 사향 등등 여러 향료에 대해서는 좀더 자료를 찾아보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하나 더 기억에 남는, 인도네시아 ‘소자바’(수마트라섬) 페를렉 왕국 이야기.


“그들은 여러 가지를 숭배하는데, 아침에 일어나 처음 눈에 띄는 것을 숭배한다.”


마음에 든다! 이런 마음가짐으로 살아야겠다. 아침에 일어나 처음 눈에 띄는 것을 숭배한다! 나는 내 가족을 숭배하고 새벽공기를 숭배하고 지하철5호선을 숭배하고 이 도시와 나의 삶을 숭배하리라! 이것은 새해 첫 책으로 선택해준 데에 감사하며 폴로가 나에게 주는 한해의 선물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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