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추리소설들을 읽었다.
오빠네 들렀다가 받아온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네 권 & 짤막한 독후감들.
엔드하우스의 비극 Peril at End House (1932)
애거서 크리스티 책을 마지막으로 읽은 것이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이지만, 어릴 적엔 (누구나 한번쯤은 그랬듯이) 나도 추리소설 팬이었다. 나이가 들어 읽어도 재미있을까? 오래전 손에 땀을 쥐게 했던 크리스티 특유의 흥미진진함, 치밀한 플롯 속에 간간이 읽히는 인간에 대한 통찰, 그런 것들이 지금도 내게 감동을 줄 수 있을까? 한밤중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읽으며 재미와 공포 속에 책장을 넘겨야할지 말아야할지 갈등하게 만들었던 크리스티 여사 아닌가. 하지만 어릴적 마음에 새겨놓았던 책들이 훗날 아무 감동도 없는 ‘한 순간의 것들’로 판명나 오히려 ‘아니 읽는 편이 좋았던’ 꼴이 돼버린 것이 한두번인가. 그래서 일부러 좀 시큰둥하게 검고 매끈한 하드커버를 넘기기 시작했다.
재미있었다! 흥미진진했다! (이 소설은 특히나 공포스런 내용이 아니었던 탓에) 어릴적 만큼의 공포는 없지만 크리스티 여사님의 위력은 여전했다. 추리소설들 중에서 특별히 명작인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다 읽을 때까지 잠시도 책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까부는 아이를 옆에 두고서 어수선한 와중에도 끝까지 책장을 넘겼다. 독자에게서 이렇게 높은 집중력을 이끌어내는 것은 대단한 능력이다.
마지막으로 죽음이 오다 Death Comes as the End (1932)
크리스티의 작품들 중에서 이렇게 동시대가 아닌 과거를 배경으로 삼은 것이 또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크리스티, 하면 떠오르는 것은 100년전 혹은 그보다 좀 뒤의 영국 풍경을 담은 다정하면서도 치밀한 추리소설인데 말이다.
이 소설은 제목이 문학적이다-- 문학을 놓고 ‘문학적이다’ 하니 좀 우습지만, ‘무슨무슨 살인사건’ 하는 종류의 제목과 느낌이 다르다는 얘기다. 내용도 그렇다. 고대 이집트라니. 하긴, 이것도 정말 ‘영국적인 설정’이라 할수 있겠다(카이로 힐튼호텔이 ‘나일 살인사건’의 배경이라는데 나는 그곳에 가보지도, 소설을 읽지도 못했다). 여하튼 소설의 배경은 고대 이집트이고, 등장인물들의 이름도 제법 이집트스럽다(돈 많은 묘지관리인 이름을 고대 이집트 최고의 재상 이름인 ‘임호테프’로 붙인 것은 좀 오버였다고 본다).
임호테프 젊은 부인 노프레트 묘사한 구절 같은 곳, 군데군데 조금씩 튄다 싶은 부분이 있긴 하지만 역시나 재미있게 읽었다. 날마다 추리소설을 한권씩 보면 인생이 재미있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애써 돈들여 지금보다 더 재미있게 만들 필요가 있나 싶어 그만두기로 했다.
비둘기 속의 고양이 Cat Among the Pigeons (1959)
추리력에 있어서라면-- 아마 나보다 이런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을 찾기도 힘들 것이다. 나는 추리력이 조금이라도 필요한 영화나 소설 같은 것 거의 이해를 하지 못한다. 범인 잡아내는 것은 언제나 내 능력 밖이다.
추리소설은 작가와 독자와의 싸움이라는데, 나는 아마도 99% 작가에게 질 것이다. 하물며 독자들 잘 속이는 애거서 크리스티의 책을 놓고 내 추리력을 시험대에 올릴 생각은 전혀 없었다. 실제로 이 소설 읽으면서 나는 범인의 단서라는 것은 조금도 찾아내지 못했고, 범인은 역시나 내가 짐작도 못 했던 사람이었다. ^^;; 이노무 뇌야, 노력을 좀 해보란 말이야...
이 소설 참 재미있었다. 살쾡이처럼 독하고 어려서부터 모질었던 사람. 마지막 범인이 밝혀지는 부분에서, 이상하게도 범인에 대한 어느 등장인물의 한 마디가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크리스티 소설 다 재미있지만 나는 이 작품이 참 좋았다. 비둘기 속의 고양이라... 살인사건에 연루된 적은 없지만 그런 기분이 들 때가 있긴 하다. 내가 읽어본 것 중에 제일 좋아했던 것은 ‘0시를 향하여’였는데, 이 책도 ‘내가 좋아하는 크리스티 책’ 목록에 올려놔야겠다(사실 그런 목록은 없지만).
창백한 말 The Pale Horse
창백한 말, 이라고 해서 처음엔 무슨 얘기인가 했다.
“And when He had opened the ‘FOURTH SEAL,’ I heard the voice of the ‘Fourth Beast’ say, Come. And I looked, and behold a PALE HORSE: and his name that sat on him was DEATH, and HELL (Hades) followed with him. And power was given unto them over the fourth part of the earth, to kill with SWORD, and with HUNGER, and with DEATH, and with the BEASTS OF THE EARTH.”
네 번째 봉인, 창백한 말을 타고 찾아오는 ‘죽음’. 아니나 다를까... 이건 또 윌리엄 블레이크다. 나는 벡신스키, 블레이크, 오키프, 보슈, 이런 식의 우울음침엽기적인 그림들하고는 정말이지 코드가 맞지 않는데 어째 ‘창백한 말’ 듣는 순간부터 블레이크스럽다 싶었던 것을 보면, 언젠가 아마도 그 그림을 본 적이 있었던 듯.
애거서 크리스티의 ‘창백한 말’은 블레이크의 ‘창백한 말을 탄 죽음’과는 좀 색채가 다르긴 하다. 적어도 크리스티의 소설인 이상, 바이블이나 몽상이 아닌 논리적인 결론이 나올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랄까. 소설은 꽤 재미있었다. 어두침침한 영국, 안개 사이에서 벌어지는 살인사건.
주술의 메시지들과 결합된 다소 몽환적인 분위기 속에 의문이 계속 커졌다가 한번에 풀려버리는데 나는 이번에도 범인을 잡지 못했다;; 탐정 노릇은 죽어도 못 하겠지만, 덕택에 크리스티의 추리소설들을 줄줄이 재미나게 읽었으니 추리 재능 없는 것이 별로 아쉽지는 않다. 결론 부분이 다른 작품들보다 몇% 정도 더 허망했다는 것이 불만이라면 불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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