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이라는 괴물 The Monstrous Nation
니시카와 나가오 (지은이) | 윤대석 (옮긴이) | 소명출판 | 2002-01-25
일본의 노학자가 근대를 말한다. 일본을 말한다. 한국을 말한다. 책 중간 중간은 ‘문명’과 ‘문화’에 대한 개념적 설명, 프랑스에서 탄생한 근대가 일본에 와서 어떻게 변용됐는지 등을 밝히는데 좀 어렵고 그렇게 재밌지도 않다.
하지만 책 전반을 흐르고 있는 것은 그런 구체적인 부분들이라기보다는, ‘반성’과 ‘통찰’이어서 읽는 내내 감동이 있었다. 식민지 조선에서 태어나 자랐다는 저자는 말하자면 극도의 반골인데, 이런 사람이 있기 때문에 나는 일본 사회가 참 건강하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맥락은 좀 다르지만 마루야마 마사오의 ‘현대정치의 사상과 행동’에서 보이는 것 같은 통찰력과 깊이, 역시나 얘기가 좀 다른 것 같기는 하지만 마루야마 겐지의 ‘천년 동안에’에 드러난 것 같은 전체주의적 속성에 대한 근본적인 거부, 그리고 후지따 쇼오조오의 ‘전체주의의 시대경험’에서 같은 치열한 고뇌와 의식 같은 것들 말이다. 구글을 찾아보니까 저자는 전공인 프랑스 문학에 대한 책이나 번역서도 많이 냈고, 요사이는 전체주의·군국주의 흐름을 비판하고 국민국가론을 반성하는 글들을 아주 활발하게 쓰고 있는 모양이다.
“만약 유·소년기를 보낸 장소를 고향이라고 부른다면 저의 고향은 틀림없는 조선입니다. 저는 이미 대학에서 정년을 맞이한 노인이지만, 유·소년기를 보낸 땅에 대한 기억은 해가 갈수록 선명하게 되살아나 향수에 빠지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그러나 한편 저는 가혹한 식민지 지배에 종사한 군인의 자식이고 저의 유·소년기에 대한 기억도 그러한 침략의 역사와 결부되어 있습니다. 전후 한국으로의 도항이 가능해진 후에도 저는 오랫동안 한국 땅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었습니다.”
“이 책을 비롯한 저의 국민국가 비판을 단순히 이론과 학문적 담론으로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저의 국민국가 비판은, 제 자신의 전쟁 체험과 전후 체험의 일체, 즉 지금까지의 전생애와 그 전생애를 좌우했던 것에 대한 반성과 분노에서 나온, 말하자면 통한의 담론입니다. 만약 패전이 없었다면 저같은 교육을 받았던 애국소년은 그대로 용감한 병사가 되고, 여전히 무자각적인 제국주의자, 식민주의자가 되어있을 것입니다. 역사적 사실에 반하는 가정은 무의미합니다. 그러나 지금도 여전히 세계 곳곳에서, 특히 전쟁 기간에 세계의 국민국가는 그와 똑같은 애국소년, 아니 더욱 비참한 애국소년을 재생산하고 있습니다.“
저자가 말하는 국민국가론은, 근대 이래 각국이 내세운 국민국가라는 이데올로기를 지칭하는 것은 물론이고, 국민국가 이데올로기에 어쩔수 없이 포위되어 의도적이든 원치 않든 간에 거기 맞춰 사고를 할 수 밖에 없게 되는 사람들, 이른바 ‘국민’들의 문화적, 사회적, 제도적 환경 모두를 총체적으로 포함하는 개념이다. 이것은 말 그대로 국민 모두를 꽁꽁 에워싸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거부하는 것은 보통의 의식과 훈련으로는 되지 않는다.
저자 스스로도 1960년대까지는 민족문제를 낙관적으로 보았다고 한다. “한국 중국 대만 혹은 인도와 인도네시아 등 식민지 지배에서 해방된 나라의 민족주의와 국민국가 형성에 기대를 걸었고 그 나라들의 미래를 믿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기대는, 바로 그 나라들에서 독재정권이 판을 치고 식민시대나 마찬가지로 민중들이 고통을 겪게 되는 것을 보면서 바뀌었다. 문제의 원인은 특정 국가의 식민지배에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 ‘국민국가’라는 시스템 자체에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저자는 말한다. ‘반둥회의의 찬란했던 이미지’는 어디로 간 것일까, 저들의 독재정권과 일본 제국주의 정권의 본질적인 차이는 그럼 뭐란 말인가. 일본의 과거를 반성하고 주변 신생 ‘국민국가’들의 승리를 기원했던 나는 어디에서 정당성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
“나도 일본이 일으킨 것은 침략전쟁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이 져야 할 책임을 생각한다. 그러나 어떠한 반성과 행동을 한다고 해도 그것이 ‘일본 국민으로서의 자랑’과 ‘긍지’를 되찾기 위해서는 결코 아니다. 오히려 자신을 일본 및 일본국민과 동일화시키면서 무엇을 말하고 행하는 것만은 그만두자는 것이 내가 전쟁에서 배웠고, 전후문학을 읽으면서 키워온 생각이었다.”
전후 일본에서 천황은 온국민이 같이 과거를 참회하자고 했다. 자기 죄를 왜 국민이? 몇몇의 죄를 왜 국민이? 국민으로서 사죄하는 순간, 국민은 천황과 제국주의 세력의 공범이고 동반자이다. 동시에 천황과 제국주의 세력의 죄는 희석되고 사라졌던 것이 전후 일본의 희한한 과거사 청산 메커니즘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저자가 “국민임을 거부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반성”이라고 하는 것이 이해가 간다.
“홉스와 마르크스 덕분에 우리들은 국가를 괴물(Leviathan)로 그려내는 데에는 익숙하다. 그러나 ‘국민’도 또한 무서워해야 할 괴물이 아니라고는 할 수 없다.”
저자의 국민국가론이 ‘국가에 대한 거부’를 담은 적잖은 시각들과 구분되는 것은, 국민들을 국가주의의 희생양이나 피동적인 존재로 보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국민이길 거부하지 않는 한, 너도 나도 언제든 천황의 신민이 될 수 있고, 월남의 한국군이 될 수 있고, 이라크의 미군이 될 수 있다. 거부하지 않는 한 너와 나는 언제나 괴물이 될 수 있다!
사람을 괴물로 만드는 ‘국민화’ 작업을 가리켜 저자는 ‘국가가 사람을 회수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그 과정은 실로 우리를 똘똘 감싸고 있다. 사람은 문화에 의해, 문학과 예술에 의해, 가족과 학교로 인해, 출생신고와 호적·신분·학력에 의해, 과학과 모든 학문을 통해, 때로는 종교에 의해, ‘국민’과 ‘민족’과 ‘대중’의 개념을 통해, 텔레비전과 신문과 모든 정보를 통해, 스포츠를 통해, 만국박람회와 축제와 모든 이벤트를 통해 국가로 회수된다. 또한 사람은 생활과 노동의 장을 통해, 질병과 범죄 혹은 그런 것에 대한 공포심을 통해, 복지국가의 개념을 통해 국가로 다시 흘러들어간다.
“심지어 사람은 반체제운동을 통해서도 국가로 회수된다. 자발적인 반체제운동 자체가 시간이 흐르면 차차 체제화되어 간다. 모든 반체제운동은 그것이 국가권력의 탈취를 목적으로 삼는 한, 국가권력을 통해 자기의 주장을 실현하려고 하는 한, 즉 또 하나의 국가를 지향하는 한 마지막에는 체제화되어 국가로 회수된다. 사람은 전쟁의 비참한 기억을 통해, 전쟁 희생자의 고통과 히로시마·나가사키·오키나와를 통해서조차, 평화운동을 통해서조차 국가로 회수된다.”
그럼 대체 어쩌란 말인가! 저자의 말마따나, 모든 사람을 국민으로 만들어 국가로 회수하는 것이 곧 근대의 역사이고 우리들 국민의 역사였다. 시작은 역시 작은 것, 그러나 변증법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국민국가는 실로 교묘하게 만들어진 인공적 기계이고 그것의 강제력은 압도적이지만, 우리들은 국가로 회수되는 순간에도 반드시 전면적으로 회수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위화감과 반발심을 품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그것이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국민통합이 강화되어 가는 과정은, 국민국가의 틀이 흔들리기 시작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1060년대, 70년대, 80년대, 90년대를 지나면서 일본 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다양한 흔들림이 있었다. 비록 국가와 국민이라는 두 가지 괴물의 존재를 근본적으로 뒤집으려는 의도는 없었다 해도 말이다.
출발은 국민을 ‘상대화’하는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스스로 탈국민화를 도모하여 국가를 상대화하는 것은 실은 아주 곤란한 작업입니다. 우리들은 이미 사고도 감성도 항상 국민화되어 있기 때문에, 가령 우리들이 말을 하면 그것은 바로 국어이고, 대부분의 경우 국가 이데올로기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국가의 상대화는 국민의 상대화이기도 합니다. 지금 말하고 있는 국민으로서의 ‘나’와 ‘나’의 상대화가 문제시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국민국가가 흔들리고 있는 시대의 변화를 관찰하는 것, 국가 이데올로기에서 가능한 멀리 떨어지기 위해 궁리와 노력을 하는 것, 우리들이 국가로 회수되는 무수한 회로를 응시하고 그 회로에서 몸을 빼기 위해 애쓰는 것, 그 지점에서 발견되는 다양한 착취와 차별에 대해 가능한 이의를 제기하는 것. 국민이기를 거부하는 것은 나의 자유를 위한, 정의를 위한 것이다!
이런 책을 읽고 나면 항상 나를 좀 반성하게 되는데, 나의 반성은 그리 치열하지는 않다. 국민이기는 참 싫다, 하는 정도로, ‘남쪽으로 튀어’ 같은 소설을 읽으면서 대리만족을 하고 또 이런 책을 통해 존경심과 감동을 느끼게 되지만 실제로는 이 돌돌 말린 회로에서 벗어날 방법을 진지하게 찾지는 않는다. 그래도 궁리는 해야 하고, 적어도 싫어하고 반발심을 갖고 멍청하게 끌려 다니지 않아야겠다, 하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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