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의 영웅 살라딘과 신의 전사들 Warriors of God (2001)
제임스 레스턴 (지은이) | 이현주 (옮긴이) | 민음사 | 2003-04-15
이런 종류의 책을 그다지 좋아하는 편은 아닌지라, 아주 오랫동안 묵혀놓고 있었다. 이슬람에 관심이 많은 편임에도 불구하고 정수일 선생의 ‘이슬람문명’과 함께 가장 오랫동안 내 책꽂이에서 주인의 손을 타지 못했던 책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책이다. 아무래도 해치워야! 하는 생각에서 출근길 전철용 책으로 골랐다. 의외로(?) 재미있었다.
저자의 글쓰는 방식은 경쾌하면서도 산만하고, 시니컬하면서도 재치가 넘친다. ‘문체’라는 측면에서 냉소와 재치는 대개 같이 가는 경우가 많은데, 문제는 그 배합 비율이다. 너무 틱틱거리면 읽는 사람 입장에선 짜증나기 쉽고, 너무 우직하면 저널리스트(노블리스트도 마찬가지다)의 근성이 의심스럽다. 너무 꼬아놓으면 정신 산만해지고, 너무 투박하면 읽는 재미가 떨어진다. 제임스 레스턴의 경우는 워낙 대 문장가로 알려져 있기도 하거니와, 비꼬기와 따스함, 신랄함과 재치가 괜찮은 비율로 배합돼 있어서 읽는 맛이 있었다.
살라딘과 리처드의 이야기를 당대 유럽과 이슬람의 이야기와 연결지어서 교차시켜 놓았다. ‘십자군-유럽-리처드’의 한묶음과 ‘이슬람-아랍-살라딘’ 한묶음이 번갈아 이어지는데, 저자의 ‘애정’은 45대 55, 혹은 40대 60 정도인 것 같다. 리처드는 카리스마 넘치는 멋쟁이 낭만파이지만 정치력이 떨어지고 경솔하다. 살라딘은 때론 신중함이 지나치지만 관대하고 신앙심이 깊다. 리처드가 ‘군인’이라면 살라딘은 ‘군주’다. 그런데 애정의 강도와 관계 없이, 저자가 서양문명권의 사람이라는 기본적인 한계 탓에 기독교-유럽 문명권에 대한 빼곡한 설명에 비해 이슬람-아랍 세계에 대한 이해를 도울만한 서술은 상대적으로 적은 것이 흠이라면 흠이다.
전쟁 소설을 기대했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인상깊었던 것은 저자가 복원해낸 십자군 시절 중근동 도시의 풍경이었다. 중세 도시 아크레에 대한 묘사 같은 것들을 통해 어렴풋하게나마 느껴지는 향료 냄새, 햇살과 먼지, 비릿한 내음이 코끝을 맴도는 것 같은 기분.
중세인들에게 아크레는 콘스탄티노플에 버금가는 거대한 주요 도시였다. 이 곳은 고대 페니키아의 남부 도시였던 곳으로, 세 대륙이 여기서 만나기 때문에 다양한 종교와 인종이 만나는 곳이었다. 이곳은 또 베네치아와 마르세유의 상인들이 북아프리카와 예멘의 무역상과 섞이고, 유대인과 아르메니아 사람들이 모술의 네스토리우스 교도들, 바그다드의 이맘들과 어깨를 부딪치는 곳이었다. 그리고 어딘가에는 마시아프와 알카프에서 온 아사신파들이 숨어 있었다. 외부 성벽에서 항구까지는 넓은 부셰리 거리가 나 있었다. 시끄럽고 냄새 나며 더럽고 다양한 인종들로 북적거리는, 깊은 냄비 모양의 흥미로운 도시가 아크레였다.
아크레는 신성한 요구와 세속적인 성향이 혼합된 도시였다. 도시의 부유한 엘리트들은 거대한 빌라에서 화려하고 편안하게 살았다. 도시의 대주교는 상류층의 타락과 폭력을 꾸짖었다. 이 도시는 살인율이 높고, 귀족 부인들이 남편을 독살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창녀들도 많았는데 이곳의 사창굴들은 주로 수도사들이 창녀에게 대여한 집들이었다. 이곳을 방문한 무슬림들은 “자진해서 남성들의 목표가 되었고 금지된 영역을 허락하며, 칼을 맞고 연인에게 창피를 당하던” 유럽 창녀에게 침을 흘렸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무슬림 여자들이 쇠사슬에 묶여 있는 것에 대해서는 불평했다. 무슬림들은 도시의 돼지와 십자가를 증오했고, 모스크가 교회로 바뀌고 뾰족탑이 종탑으로 변한 것에 절망했다. 지금은 성 요한의 교회가 된 거대한 프라이데이 모스크의 미흐랍만이 무슬림들의 휴식처였다.
(책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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