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기의 끝 Childhood's End
아서 C. 클라크 (지은이) | 정영목 (옮긴이) | 시공사 | 2002-09-09
멋진 책.
그저 ‘멋지다’는 말로는 사실 설명이 안 되는데 말이다. 책은 반세기 전, 아폴로호가 달에 착륙하기 전에 쓰여졌다. 저자는 SF계의 3대 거목으로 불린다는 아서 클라크다. 나는 그와 함께 ‘3대’라는 이름이 붙는 아이작 아시모프의 제대로 된 소설을 한번도 읽어보지 못했고, 로버트 하인라인의 책도 11년 전 단 한권 읽은 것 말고는 접하지를 못했다. SF에 별반 관심이 없다 해도 무방하다. SF라 부르는지 그냥 ‘소설’이라 부르는지는 잘 모르지만, 이런 종류의 책들 중에서 유일하게, 그리고 다른 모든 소설들을 합쳐서도 ‘가장’ 좋아한다 말할 수 있는 것은 로저 젤라즈니의 ‘앰버연대기’이다.
‘유년기의 끝’은 멋지다. 굳이 이 책이 ‘오래전에 쓰여진 책’임을 상기시키지 않더라도, 오늘날의 SF로 읽더라도 책은 충분히 멋지고 재미있다. 그래서 이 작가가 거장이라는 칭송을 듣는 것일까? 소설은 미국과 소련이 우주선 발사 경쟁을 벌이고 있는 모습에서 출발해, 불현듯 상공을 메운 ‘외계인’들의 출현 이후의 시기로 곧장 넘어간다. 책 전반부에서 독자들로 하여금 강도 높은 궁금증을 갖게 만드는 외계인들의 형상이라든가 인간을 계몽하고 훈육하는 외계인들의 시스템 같은 것들이 이색적이었다.
공상과학소설이라기보다는 철학책 한 권을 읽은 듯했다. 일본 만화 중에서 나는 유독 ‘선계전 봉신연의’를 좋아한다. 다소 조잡한 그림, 우스꽝스럽고 엽기적이며 원색적인 액세서리들에도 불구하고 그 만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하나다. ‘복합적’이고 ‘근본적’이기 때문이다. 정해진 미래를 따를 것인가, 인간의 자유의지를 믿을 것인가.
나는 봉신연의가 그것을 아주 익살스럽게 다룬 만화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 유명한 ‘신세기 에반게리온’도 그런 코드로 읽었다. 정해진 미래인가, 인간의 자유의지로 개척해가는 미래인가. ‘은하철도 999’도 내겐 그렇게 보였다. 기계인간으로서의 영생인가, 자유의지로 살다 가는 치명적인 인간의 생인가.
그리하여 나는 이 책 ‘유년기의 끝’도 그렇게 읽었다. 소설에서 작가는 지구의 인간들과 외계인들, 그리고 정체를 파악할 수 없는 우주의 ‘근원적인 힘’을 이야기하면서 자아가 있는 개체와 개별성을 잃은 완벽한 통일체 사이에서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를 묻는다.
“모든 사람의 정신이 바다에 둘러싸인 섬이라고 해봅시다. 모든 섬이 고립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모든 섬은 자기들의 기반인 반암(盤岩)에 의해 연결되어 있습니다. 만일 바다가 사라진다면 섬도 사라지죠. 그 섬은 모두 대륙의 일부가 될 것이고, 섬의 개별성은 사라질 겁니다.”
작가는 그렇게 ‘정신의 통합’을 설명한다. 그런 일이 가능할까? 가능할지도. 과학은 이미 많은 상상들을 현실로 보여주었다.
이 책 혹은 저자에 대한 서지학적 지식이 없는 상태인 덕분에 나의 느낌, 감정의 흐름을 충실히 따라가며 읽었다. 오버로드라는 희한한 이름에 인류에 익숙한 형상을 한 외계인들은 훈육을 하고, 지구인들은 훈육을 받는다(다른 점이 있다면 이 책에는 봉신연의의 태공망이나 999의 철이 같은 극렬한 반항아는 없다는 것이다).
지구인들은 거대한 정신으로 변해간다- 이것은 아주 놀랍고도 재미있는 주제인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저자의 생각이 별로 정리되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책은 마치 선문답을 하듯이, 이미지와 색깔의 변화를 묘사하는 것으로 지구인의 정신이 우주와 통합돼 가는 과정을 그린다.
작가는 인류 역사를 시니컬하면서도 재치 있는 방식으로 묵살해버린다. 싸움쟁이 갈등투성이 범죄투성이 인간의 역사를 과감히 진화의 먼 초창기 아메바 시절의 이야기 정도로 치부해버리고, 인류가 하나로 통합되어가는 상태를 '유년기'로 정의한다. 책은 말 그대로 '유년기의 끝'에서 끝난다. 유년기 뒤에 오는 것은 위대한 정신일까, 아니면 죽음도 삶도 아닌 우주의 암흑물질 같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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