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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빨강 1, 2 Benim Adim Kirmizi (1998)
오르한 파묵 (지은이) | 이난아 (옮긴이) | 민음사 | 2004-04-23
진짜 맘에 드는 소설 하나를 만났다. 진정한 이야기, 심오하고 풍요로운 소설, 매혹 그 자체. 지나친 찬사인가? 나 혼자 좋아하는 걸까?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아마도 최근 몇 년간 미국이나 유럽의 언론들이 열광에 열광을 보냈던 ‘덜 서구적인’ 작가를 꼽자면 이스마일 카다레와 오르한 파묵 두 사람일텐데, 지난 연말에 읽은 카다레의 ‘꿈의 궁전’과 비교해서도 ‘내 이름은 빨강’은 소설 중의 소설이다. 유행 타는 파울로 코엘료나 다빈치 코드 류하고는 비교가 되지 않고, 적당히 즐거운 일본 소설들하고도 깊이와 넓이와 모양이 완전히 다르다.
‘액자소설’이라는 말이 있는데, 정확히 말하면 이 책은 ‘액자소설’은 아니다. 하지만 그림을 소재로 층층이 이야기를 깔아놓은 이 책은 사전적인 의미의 ‘액자 같은 소설’이다. 겹겹의 액자 속에 숨겨진 의미 하나하나를 찾아야 하는 소설책, 삽화 한 장 없지만 중세 이슬람의 세밀화를 머리 속에 그리게 만드는 ‘그림 없는 그림책’.
소설은 16세기 말, 아마도 슐레이만 대제의 치세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았던 시기의 이스탄불에서 일어난 의문의 살인사건으로 시작된다. 우물 안에 누워 말을 거는 화자(話者)가 시체라는 것은 그다지 놀라울 것도 없지만 그 시신이 한때 ‘세밀화가’였다고 하면 이야기가 흥미로워질 수밖에.
'세밀화’는 수시로 목소리를 바꿔 변주되는 이 소설의 진정한 주인공이다. ‘내 이름은 빨강’을 읽는 것은, 아마도 서양이 아닌 세계 모든 것에 무관심했을 우리나라 독자들에겐 세밀화를 알아가는 뜻밖의 재미난 과정이 될 것 같다. 세밀화는 이슬람 미술의 꽃이고, 세밀화를 상상하는 것은 이슬람 문화의 정수를 엿보는 것이다. 아쉽게도 책은 ‘소설’일 뿐이어서 세밀화를 직접 눈으로 보는 기회는 뒤로 미뤄야겠지만. 세밀화는 건축과 함께 이슬람 미술의 양대 축이라는 것만 알고 넘어가자.
아시아에서 아프리카까지 광활한 제국을 건설한 투르크는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을 함락함으로써 제국의 절정을 맞는다. 그러나 이슬람 세계 안에서 투르크는 ‘제국의 주인’이기는 했지만 문화적 헤게모니를 장악하진 못했다. 크게 이슬람세계를 아랍(아라비아)과 이란(페르시아), 투르크 세 지역으로 나눠본다면, 아랍은 물론 이슬람의 발상지이지만 이란의 화려한 문화에 곧 침식됐고 투르크 역시 이란에서 문화적 자양분을 받아와야 했다.
중국풍이 섞인 아름답고 신비로운 세밀화는 몽골과 이란의 합작품이다. 타브리즈, 쉬라즈, 이스파한. 이 책에 이란(페르시아)의 지명이 반복적으로 나오는 것은 세밀화의 본고장이 그곳이었기 때문이다. 아랍과 투르크가 페르시아를 잇달이 정복했지만 실은 페르시아야말로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제국이 있었던 곳 아니던가.
이런저런 이슬람 세계 내부의 흐름을 이해하고 읽더라도, 16세기 이스탄불은 ‘세계의 중심’이었다. 책에서 찾아낼 수 있는 또 하나의 액자는 ‘이스탄불’이다. 이 것은 이스탄불이기에 나올 수 있는 이야기다. 이스탄불은 세계의 어느 곳과도 비교할 수 없는 도시다. 세상 어느 도시가 같으랴마는, 런던을 파리에, 오늘날의 뉴욕을 과거의 로마에 비유한다 하더라도 이스탄불과 비교할 수 있는 곳은 없다!
동서양 문명의 교차점, 수천년 역사의 더께가 (소설 속 스산한 눈발처럼 혹은 향료시장에 먼지처럼 떠도는 짙은 냄새처럼) 겹겹이 쌓여 있는 곳. 작가가 묘사한 술탄의 보물창고 속 화려한 보물들은 알리바바 이야기의 동굴 안 보물처럼 허황된 이야기처럼 들리겠지만 톱카프 궁전의 화려한 보석의 방을 본 이들은 그것이 살아 숨쉬는 이스탄불의 생생한 스케치임을 이해할 수 있다. 한적한 슐레이마니예(슐레이만) 모스크, 보스포러스, 위스크다르, 아야 소피아. 이 소설은 걸출한 투르크인 소설가가 이스탄불에 보내는 헌사다.
그러나 겹겹이 쳐진 액자의 사이사이엔 동시에 ‘베네치아 화풍’으로 상징되는 서양의 새로운 시대정신과 맞닥뜨리게 된 투르크 제국의 불안감이, ‘근대’와 대면해야 할 ‘중세’의 불안감이, 서양의 도전에 직면하게 된 동양이 느끼는 혼란이 스며들어 있다. 서양풍을 받아들여 우리 기술로 삼자, 서양의 압박에 부딪친 동방의 나라들은 너나없이 저렇게 ‘동도서기(東道西器)’를 외치지 않았던가. 그런 불안감이 제국의 정점에서 고개를 들고 있는 상황, 우물에 버려진 시체는 동도서기와 위정척사의 대립 사이에서 굴러떨어진 시체였을 뿐이다.
작가가 말하려는 것은 대체 무얼까. 짧은 한국어판 서문에서 작가는 매우 분명하게 ‘전통을 잃지 말자’고 말한다. 글로벌리즘 앞에서 세계가 서양문화의 홍수에 휩쓸려 제 모습을 잃는 시대, ‘이스탄불에 바치는 헌사’는 사라져가는 모든 오래된 도시들에 대한 헌사이고 그들을 지키자는 목소리인 것일까. 확대해석인 것 같기도 하지만 저자 자신이 그렇게 말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런 작가 파묵이 터키 정부의 탄압을 받고 유럽이 구명운동에 나서고 있는 것도 참 아이러니다. 번역 매우 훌륭하고, 이런 작품을 중역 없이 국내에 소개해줬다는 점에서 번역자를 한번 안아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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