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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룬과 이야기 바다 Haroun and The Sea of Stories
살만 루슈디 (지은이) | 김석희 (옮긴이) | 달리(이레)
살만 루시디라면 너무나 유명한 인물인데다, 내가 그의 이름을 처음 들은 것만해도 벌써 기억이 가물가물할 정도로 오래 전의 일이다. 하지만 ‘악마의 시’라든가 ‘한밤중의 아이들’ 같은 책을 읽어보지 못한 상태이고, 이 책 ‘하룬과 이야기바다’가 내가 읽은 루시디의 첫 책이다.
한 문장으로 말하면 ‘아라비안나이트의 슬픈 오마주’가 되겠다. 타이틀롤을 비롯해 곳곳이 천일야화를 밑바탕에 깔고 있다. 주인공 이름은 하룬이고, 아버지의 이름은 라시드이다. 그들의 ‘성(姓)’은 ‘칼리파’로 나오는데 종합하면 ‘칼리파 하룬 알 라시드’가 되겠다. 위대한 하룬 알 라시드는 물론 천일야화의 그 사람, 디즈니가 이미지 구겨버린 신드바드 시절 바그다드의 칼리프(지배자)였다. 책 곳곳에는 11, 101, 1001, 10억과 1 같은 숫자들이 등장한다. 하룬 알 라시드, 이야기, 1001. 천일야화를 ‘명시’하다시피 하고 있으니 이건 뭐 메타포라 볼 수도 없다.
이 책은 루시디가 쓴 동화다. 널리 알려진 대로 그는 아야툴라 호메이니의 암살 명령(역자 서문에 그걸 ‘파트와’라고 했는데 잘못된 말이다. 파트와는 판결문 같은 것을 말하는데, 신정일치 곧 신법체제인 이슬람에서 ‘판례’ 내지 ‘훈령’에 해당한다. 호메이니는 루시디를 살해하라는 파트와를 내린 것이다)으로 인해 오랜 세월 숨어 지내면서 반벙어리 노릇을 해야 했다.
‘하룬과 이야기바다’는 파트와가 철회된 뒤에 쓰인 것 같은데, 어린이들에게 들려주는 동화 형식을 띠고 있다. 책이 얇고 내용도 단순하다. ‘이야기를 잃어버린 이야기꾼’ 아버지를 위해 소년 하룬이 지구의 숨겨진 위성 ‘이바구’를 찾아가 이야기바다에서 이야기를 되찾는다는 줄거리. 그다지 특이한 점도 없고, 매력이 철철 넘치지도 않는다. 책이 나쁜 것은 아니고, 어른인 내가 어린이 책을 보려니 그런 느낌이 드는 것뿐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이 ‘슬픈 오마주’라고 한 이유를 몇 가지 들어보자면
첫째, 동화의 형식을 빌었지만 책은 분명히 ‘정치적인 우화’다. 이야기를 통제해 장미빛 달콤한 얘기만 늘어놓게 하려는 정치인은 가라! 그리하여 이 책은 세계 최고의 민담 아라비안나이트의 들며 작가의 펜을 부러뜨리려는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을 질타하는 우화가 된다.
둘째, 책은 ‘이야기’가 사라져가는 세상을 슬퍼하는 내용으로 돼 있다. 이야기를 무시하는 자, 꿈과 희망과 환상을 지우려는 단조롭고 까탈스럽고 속물스런 것들에 반대한다! 루시디는 '이야기 중의 이야기'인 아라비안나이트에 기대어 이야기가 얼마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지, 이야기 없는 세상은 즐거움 없는 세상임을 깨닫게 해주려고 애쓴다.
세째, 이건 순전히 내 감상인지는 모르겠는데, 줄거리 혹은 주제와 상관없이 이 소설은 너무나 ‘서양식’이다. 좀 덜 짜여진 해리 포터 스타일이라고 할까. 주인공 이름은 아랍 이름인데 이야기 구성은 스필버그 풍 어린이 모험담 영화 같다. 아니면 이런 건 어떨까. 미야자키 하야오가 이 책을 가지고 애니메이션을 만든다면, 최소한 ‘하울의 움직이는 성’보다는 훌륭한 작품이 나올 수 있을 것 같다.
루시디는 인도의 무슬림 집안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자랐고, 영국식 교육을 받았으며 이슬람 근본주의에 반대한다. 이렇게만 써놓고 보면 내가 좋아하는 정치평론가 겸 ‘작가’인 타리크 알리와 똑같다. 인도에 이슬람에 서양에, 부러울 정도로 느무나 풍요로운 문화적 토양에서 자라난 이들이다. 그래서 루시디가 풀어놓을 이야기에 한껏 기대를 걸었는데, 곁가지부터 손을 댄 것은 내 실수였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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