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의 사도 A Devil's Chaplain (2003)
리처드 도킨스. 이한음 옮김. 바다출판사
저자는 리처드 도킨스이고, 책 제목은 다윈의 글에서 나왔다고 한다. 이런 거창한 이름들을 들먹이면서 ‘웃기고 재미난 책’이라고 하면 외려 날 이상하게 볼 주변인(말 그대로 주변 사람들)들도 있겠지만, 허나 어쩌랴. 사실인 것을. 정말 웃기고 재미있다.
책이 너무 맘에 들어서 괜히 흥분해 리뷰를 도저히 할 수 없다, 라고 하면 될까. 이 재미난 책에 쓸데없는 나의 감상 따위를 덧붙여서 혹시나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들 이유가 있을까? 이 책이 정말이지 황당할 정도로 맘에 들었다는 것, 도킨스에 대한 애정을 넘어서서 도킨스가 애정을 표현한 다른 저술가들의 글까지 몽땅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는 것,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라는 기나긴 제목의 SF 소설까지 읽어보고픈 생각이 들었다는 것, 동시에 스티븐 제이 굴드에 대한 애정마저도 더욱 깊어졌다는 것.
내 생의 책 중 하나로 마음 깊이 간직하고 있는 ‘핀치의 부리’ 만큼 이 책이 좋다고 하면 어쩌면 내 친한 친구들은 내가 ‘악마의 사도’에 얼마나 폭 빠졌는지를 이해할지도 모르겠다. 당분간 ‘악마의 사도’ 광분모드가 되지 않을까 싶다.
미리 말하자면 이 책은 도킨스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은 읽어선 안된다. 도킨스와 굴드의 다른 책들로 일단 바닥을 깔아놓고, 그 뒤에 이 책을 읽을 일이다. 굴드와 도킨스의 책을 각각 한권씩이라도 읽어본 이들이라면, 특히 굴드의 ‘풀하우스’와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읽은 이들이라면 반드시! 이 책을 읽어야 한다. 이 매력 넘치는 인간들 같으니! 나 완존히 도킨스 아저씨 때문에 미치겟또...
도킨스 아저씨의 종교비판.
종교를 정신 바이러스로 묘사하면, 종교를 비난하거나 심하면 적대시한다는 식으로 해석되곤 한다. 둘 다이다. 나는 ‘체계를 갖춘 종교’에 왜 그렇게 적대적이냐는 질문을 가끔 받는다. 그럴 때면 나는 체계를 갖추지 못한 종교에도 똑같이 호의적이지 않다는 말로 서두를 떼곤 한다...
체계를 갖춘 종교가 노골적인 적대감의 대상이 되어 마땅한 이유는 (버트란드 러셀이 태양 주위를 도는 중국 찻주전자라는 가상의 사례로 압축시킨 상상을 예로 들자면) 러셀의 찻주전자와 달리 종교가 강력하고, 영향력을 발휘하고, 세금을 공제받으며, 아직 어려서 스스로를 방어할 수 없는 아이들에게 체계적으로 주입된다는 점 때문이다. 아이들은 찻주전자를 다룬 엉터리 책들을 암기하면서 인격 형성기를 보내라고 강요받지 않는다. 부모가 기이한 모양의 찻주전자를 선호한다고 해서 정부 보조금을 받는 학교가 그 부모의 아이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일은 없다. 찻주전자 신자들은 찻주전자 불신자, 찻주전자 배교자, 찻주전자 이단자, 찻주전자 모독자를 돌로 쳐죽이지 않는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하나가 아니라 세 개의 찻주전자를 믿는 비정통파 부모의 딸과 혼인하지 말라고 경고하지 않는다. 찻주전자에 우유를 먼저 따르는 사람들이 찻물을 먼저 따르는 사람들의 무릎에 일부러 우유를 엎지르는 짓도 하지 않는다.
...이제 솔직해지자. 임금님은 벌거숭이라고 말이다. 이제 ‘민족주의자’ ‘왕당원’ ‘공동체’ ‘인종집단’ ‘문화’ ‘문명’ 같은 완곡어법은 그만 써라. 당신에게 필요한 단어는 종교이다. 당신이 위선적인 행동까지 해가면서 마주치지 않으려 애쓰는 단어는 종교이다.
이 책은 도킨스가 그동안 여기저기에 썼던 글들을 묶은 것이다. 책을 관통하는 주제는 ‘과학적으로 사고하라’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나는 비과학적인 모든 것을 혐오한다 어쩔래”가 되겠다.
더불어 책에는 도킨스가 지인들에게 보내는 헌사와 추모사들도 들어있다. 과학소설 작가 더글러스 애덤스에게 보내는 추모사의 한 토막.
과학계는 친구를 하나 잃었고, 문학계는 등물을 하나 잃었으며, 마운틴고릴라와 검은코뿔소는 용감한 수호자를 하나 잃었고 애플 컴퓨터는 가장 달변인 대변자를 잃었다. 그리고 나는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지적 동료이자 내가 아는 한 가장 친절하고 재미있는 사람을 하나 잃었다.
과학계 동료인 윌리엄 해밀튼의 추모사에는 도킨스 특유의 유머와 애정이 넘쳐나서, 나는 추모사를 읽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웃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멍한 정신 상태는 전설적이라 할 정도였지만,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굴드와의 관계에 대한 고백, 굴드의 ‘풀하우스’에 붙인 서평, 굴드에게 보내는 편지 등 굴드와 관련된 부분도 한 챕터가 들어가 있다. 어찌나 솔직한지. 두 학자의 학문적 갈등과 인간적인 우정은 어떤 소설보다도 재미있는 읽을거리다.
스티븐 제이 굴드와 나는 태양이 지쳐서 하늘 저편으로 넘어갈 때까지 대화를 나눈 적은 없다. 우리는 만났을 때에는 성의를 다했지만, 우리가 가까웠다고 주장한다면 솔직하지 못한 말이 될 것이다.
...그는 자신의 뻔뻔함을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며, 그가 나를 같은 부류에 포함시킨 경우가 한 차례 있었음을 독자에게 말한다 해도 용서하기를 바란다. “리처드와 나는 진화에 관한 글을 가장 잘 쓰는 두 사람이다” 물론 거기에는 ‘그러나’라는 말이 붙어 있었음을 강조해두자.
...1978년 한 유명한 과학 잡지의, 이름을 밝히기가 꺼려지는 서평 담당 편집자가 굴드의 ‘다윈 이후’에 서평을 써달라고 부탁했다. ‘유전자 결정론’의 반대자들에게 ‘보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내가 어느 쪽에 더 화가 났는지 모르겠다. 내가 유전자 ‘결정론’을 선호한다고 시사한 쪽인지, 아니면 복수심에 불타 서평을 쓸 것이라고 시사한 쪽인지 말이다.
...나는 스티븐 굴드의 말이 왜곡되었다는 쪽에 돈을 걸고, 왜곡할 필요가 전혀 없는 프레드 호일 쪽에는 쥐꼬리만큼 걸었다.
빅뱅이라는 말을 만들어낸 것으로 유명한 호일은 2001년 숨졌다. 그가 이 책을 봤으면 뭐라고 했을까.
굴드가 ‘산유리새의 불륜’이나 ‘개미의 노예 제도’ 같은 무해한 어구를 반대하는 설교를 여전히 계속하고 있다는 것도 유감이다. 그런 무해한 의인화에 반대하면서 그가 멋들어지게 던진 질문인 ‘이것이 단지 현학적인 투덜거림일까?’에는 ‘그렇다’고 큰 소리로 대답해야 한다.
굴드의 ‘경이로운 생명’에 대한 도킨스의 서평은 이렇게 시작한다.
'경이로운 생명’은 잘 쓰여진 책이자 대단히 중구난방인 책이다.
굴드의 ‘풀하우스’에 대한 서평을 읽으면서는 무릎을 치지 않을 수 없었다. 흑흑 바로 이거야, 굴드는 그 훌륭한 책에서 야구에 대해 너무 많은 분량을 할애했다고... 도킨스 아저씨는 바로 그 점을 짚었다. 대단한 리뷰어가 아닐 수 없다!
그것은 짧게 설명할 수 있는 내용이지만 그는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55쪽 분량을 야구 전문 용어로 가득 채우고 있다... 나는 나머지 세계라 불리는 어렴풋하고 거의 알려지지 않은 지역들에 사는 독자들을 대신해서 가볍게 항의를 해야겠다... 굴드가 야구에 심취한 것은 전혀 나쁜 일이 아니며, 현재 우리에게 익숙한 수준에서 야구 이야기를 조금만 가미했더라면 약간 흥미를 돋우었을 것이다. 하지만 장장 6장에 걸쳐 시종일관 지속되는 야구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읽으라는 이런 오만한 무례는 미국의 우월주의에 해당한다(그리고 나는 그것이 미국의 남성 우월주의가 아닐까 생각한다).
줄기차게 굴드를 비꼬고 있지만, 이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우정의 전류는 분명히 감지된다. 어쨌거나 진화론의 전사로서 동지를 잃은 아픔을 누구보다 크게 느꼈을 사람은 도킨스였을테니까. 굴드가 사망한 뒤 도킨스의 글들에는 상실감이 역력히 묻어난다.
도킨스 아저씨, 멋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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