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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서판- 애 엄마들한테 900쪽짜리 책은 무리겠지?

딸기21 2006. 7. 6.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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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서판 The Blank Slate (2002)
스티븐 핑커 (지은이) | 김한영 (옮긴이) | 사이언스북스 | 2004-02-16




와우... 두껍다. 900쪽이 넘는다. 비싸다. 액면가 4만원. 매트 리들리의 ‘본성과 양육’을 읽을 때 이 책이 누차 언급되는 걸 보고 과감히 구입했다. 그후로도 오랜 시간이 흘렀다... 책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길어서, 라고 하면 나 자신에게 변명이 될까. 한번 붙잡고 읽기 시작하면 몇십페이지가 후딱 넘어가는데, 900쪽을 단번에 읽을 만큼 재미있지는 않았다. ‘본성을 무시하지 말라’라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 이렇게 긴 책을 쓸 필요가 있었을까?

서구인들이 갖고 있는 ‘본성 두려움증’ 다시 말하면 유전자결정론에 대한 공포증은 나치의 인종대학살이라는 잔인한 기억의 산물이니만큼 그것을 탓하기는 힘들다. 타고난 능력 얘기 나오면 '여자들은 이래서 안돼' 소리부터 하는 꼴통들이 많으니 페미니스트들을 경직된 환경결정론자들이라 몰아부칠 일도 아니다.

책 읽으면서 나는 딴 생각을 좀 많이 했다. 저자는 본성을 이야기하는 것에 히스테리 반응을 보이는 환경결정론자들을 비판하느라 900쪽을 썼는데, 나는 내 안의 환경결정론과 유전자결정론을 점검하느라고 바빴다. 나는 아이를 키우는 엄마이고, 아이를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키울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다. 아이를 어떻게 ‘잘 키울까’라고 쓰려다가 ‘행복하게’라는 표현으로 바꿨다. 잘 키운다는 것은 내 아이가 행복한 사람이 되게 만든다는 것, 그렇게 생각하기 위해서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온갖 사람들의 경험담과 충고를 들어야 하고 여러 행태를 목격하게 된다. 작금의 정신나간듯한 사교육 열풍을 보면, 그걸 다 따라잡을 시간과 돈이 없는 나같은 엄마는 기가 질리게 마련이다. 희한하게도 한국인들은 남의 나라 사람을 볼 때에는 유전자결정론을 주장하고(동남아 사람들이 그렇지, 아프리카 넘들은 의지가 약해, 유태인들이 머리가 좋잖아, 영국 사람들은 신사야, 한국인의 민족성은 어쩌구저쩌구) 자기 아이를 키울 때에는 환경결정론을 신봉한다(부모가 이혼을 하면 애가 비행청소년이 되지, 어릴적 엄마에 대한 증오감 때문에 연쇄성폭행살인범이 되었다, 한살 때부터 과외를 시키자, 영재는 부모가 만든다).

유전자가 모든 것을 결정하지도 않지만, 부모가 돈과 시간을 투입하는대로 아이를 ‘주조’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진실은 유전자결정론과 환경결정론에서 ‘결정’이라는 글자를 떼어냈을 때, 그 사이 어딘가에 있다. 그걸 인정해야 하는데 나부터도 매일매일 조금씩 헷갈린다.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에게 이 책을 모두들 사서 읽으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어쩌면 좋아, 900쪽 짜리 책을 봤는데도 개운해지지가 않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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