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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메로스의 세계- 헥토르, 영원한 나의 영웅.

딸기21 2005. 11. 17.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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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메로스의 세계 Le monde d'Home're (2000)
피에르 비달나케 (지은이) | 이세욱 (옮긴이) | 솔출판사 | 2004-08-13



피에르 비달-나케라는 인물이 꽤 유명한 사람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구체적인 지식은 없었으므로, 저자의 이름이 안겨주는 중압감이라든가 권위라든가 하는 것에서는 완전히 자유로웠다고 해두자. 이 책은 지난해 우연히 그리스 유물 몇 점을 박물관에서 본 남편이 충동적으로 주문한 것이었다.


책은 일년 가까이 책꽂이 주위에 통상 ‘누워있었다.’ 쉽게 말해 굴러다녔다. 책이 꽤 얇다. 호메로스의 광대한 세계를 다룬 책 치고는 얇고, 가볍고, 그래서 부담 안 느끼고 읽어야지 하면서 손을 댔다가 몇 장 못 넘기고 다시 내팽개치기를 몇 차례. 덕분에 책은 책꽂이에 안착하지를 못하고 책장 주변을 헤매야 했다. 왜 그랬을까? 책 탓을 하자면, 한번에 쫙 흡입하는 맛이랄까, 그런 게 없다. 이 책은 독자를 한눈에 쫙 끌어들이는 책이 아니다. 책은 얇지만 초장에 김빠지네, 하고 팽개치지 않으려면 숨고르기를 조금 해줘야 한다.


저자는 호메로스의 양대 서사시를 비롯해 고대 그리스 서사시와 희비극, 그것들을 자양분 삼아 자라난 유럽 문학의 전통을 줄줄이 꿰고 있는 교양인이다(이럴 때에 ‘지식인’이라는 말은 좀 어울리지 않는 듯하고, 내 맘대로 ‘교양인’이라는 표현을 쓰겠다- 이것은 내가 이런 종류의 박식한 인물들에게 보내는 최고의 찬사라고 생각해주기를). 어린 시절 트로이 이야기에 흠뻑 빠졌었다는 저자는, 하인리히 슐리만과는 다른 방식으로 트로이 이야기의 ‘진실’을 후학들에게 돌려준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말 그대로 ‘호메로스의 세계’를 우리에게 펼쳐 보인다. 호메로스 시절의 헬레니즘 세계는 어떤 정서를 갖고 있었고, 어떤 세계관이 지배적이었고, 어떤 직업이 미천한 것이었고, 전투에 대해서는 어떤 개념을 갖고 있었는지 등등.


역사책이 아니라 문학책이다. 저자는 구체적인 사료를 들이대면서 당시의 세계를 재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통찰력이라는 무기로 호메로스 당시의 세계를 읽는다.


“내가 보기에, ‘오디세이아’는 그런 종류의 탐구를 통해서 설명될 수 있는 작품이 아니다. 호메로스가 현실이라고 여기는 세계는 분명히 존재한다. 그 세계의 ‘현실성’을 드러내는 징표는 인간이 땅을 경작하고 그 땅에서 빵을 만들 밀이 생산된다는 사실이다. 이타케 섬은 말할 것도 없이 인간의 세계에 속한다 (중략) 시인 자크 프레베르가 말한 ‘현실의 무시무시한 씨앗들’이라는 시구가 생각난다. 오디세우스가 파이아케스 사람들에게 들려준 여행담의 세계에도 ‘현실’이라는 이름의 무수한 주관적 해석을 낳는 그런 씨앗들이 들어 있지 않을까?”


호메로스를 둘러싼 추측은 많다. 그가 정말로 맹인이었는지, 아니면 ‘호메로스’라는 것이 일군의 창작집단을 가리키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다르다. 적어도 저자는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의 저자가 다르다는 점은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저자는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호메로스가 누구인지 몰라도 호메로스의 시를 읽고 즐기고 까마득한 고대를 상상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으니까. 그리고 그런 작업은 너무나 즐겁고 재미있는 것이니까.


뒷부분에 ‘호메로스에 관한 의문들’이라는 별도의 챕터를 두고 있는데 월터 옹의 ‘구술문화와 문자문화’에서 읽었던 것들과 겹친다. 월터 옹과 비달나케 모두 구술문화 특유의 서식어체(수식어구)를 ‘기억의 도구’로 본 밀먼 패리의 연구를 인용하고 있기 때문일까.


책을 읽다가 문득 들었던 생각. 어릴적 나는 일리아스를 읽고 오디세이아를 좀 나중에 읽었다. (물론 둘 다 제대로 된 버전이었다고는 할 수 없다) 나는 일리아스가 오디세이아보다 훨씬 재미있다고, 오디세이아는 그저 ‘영화의 속편’ 같은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었다.


“일리아스의 숭배자들은 오디세이아를 읽는 것에 시큰둥하다. 거꾸로 오디세이아의 숭배자들은 일리아스를 한 수 아래로 여긴다. 전자에 속하는 대표적인 인물이 시몬 베이유다. 그녀의 주장에 따르면 일리아스는 ‘서양이 가진 단 하나의 진짜 서사시’이고, 오디세이아는 ‘어떤 부분은 일리아스를 또 어떤 부분은 동양의 시들을 훌륭하게 모방한 작품일 뿐’이다.”


이 부분에 이어지는 저자의 분석은 재미있었다. 저자는 ‘일리아스가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이유 중의 하나는 그것이 서사시의 시작이라는 점’이라면서, ‘일리아스가 구두 전승을 집대성한 최초의 작품이라면 오디세이아는 문학이 모방, 즉 그리스어로 미메시스를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문학의 시작’이라고 말한다. 이런, 일리아스는 서사시의 시작이고 오디세이아는 문학의 시작이라니. 어쩐지 멋진 걸. 더 재미난 것은 이 부분이었다.


“오디세이아는 일리아스의 반어적인 모방이다. 아킬레우스가 저승에서 오디세우스에게 죽은 자들의 왕국을 통치하느니 차라리 농사꾼에게 품을 파는 일꾼이 되고 싶다고 말할 때, 그는 바로 일리아스의 이상인 영웅적인 죽음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아름다운 죽음은 일리아스의 대표적인 가치다. 오디세이아는 우리에게 생존의 기술을 당당하게 가르친다.”


위대하다! 일리아스는 우리에게 영웅, 죽음, 아름다움, 그런 치명적인 미학을 가르친다. 저자의 다른 표현을 빌자면 그리하여 일리아스는 ‘헥토르의 비극’이다. 반면 오디세이아는 현실과 생존의 비법을 다룬 모험담성 희극이다.


그럼 이건 어떨까? 호메로스는 아카이아인들 편일까, 트로이인들 편일까? 우리는 전쟁의 승패를 알고 있다. 아킬레우스는 이겼고, 헥토르는 죽었다. 아카이아는 이겼고, 트로이는 멸망했다. 어릴적 나의 감정을 돌이켜보면- 헥토르는 나의 영웅이었다. 아킬레우스는 싫었다. 자기 애첩을 아가멤논이 빼앗아갔다고 출정을 거부하고(헥토르와 안드로마케의 아름다운 이별시를 보라), 자기 친구가 죽자 그제서야 원수를 갚겠다고 나설 정도로 공과 사를 구분치 못하고, 헥토르를 죽인 뒤 시신을 끌고 다니며 모욕을 하다가 프리아모스가 선물을 잔뜩 싸들고 와 눈물로 호소하니 뒤늦게 자기도 울면서 인격이 있는 듯이 굴었다.


내게 아킬레우스는 영웅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난 ‘역사를 쓰는 것은 승자의 몫’이라는 사고에 진작부터 익숙해져 있었던 탓인지, 아니면 어쩐지 아프로디테보다는 아테나 쪽이 훨씬 지적이고 우아하게 느껴져서였는지, 호메로스는 아카이아 편이라고 생각했었다.


이 부분에 대한 저자의 대답은 모호하다. 대부분의 독자들은 호메로스가 트로이편이라고 생각한다고 한다. 하긴, 일리아스를 읽으면서 헥토르와 트로이를 미워하긴 힘들다. 우리는 어느새 비장한 죽음의 미학, 그 편에 서버리게 되니까. 저자는 답변을 유보한 채, 트로이가 갖고 있는 동방(소아시아)적인 면모를 비롯해 트로이와 아카이아의 차이를 고상한 말로 설명한다. 그 중 눈에 띄는 것은 이 부분이다.


“아카이아인들과 트로이인들 사이에는 훨씬 더 중대하고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이 차이는 기원전 5세기에 고전 비극의 중요한 소재가 된다. 싸움터에서 죽음을 맞는 사람들은 양 진영에 숱하게 많다. 그 중에는 자기가 싸움터에서 죽을 운명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아킬레우스의 경우가 바로 그러하다. 그는 길고 변변찮은 삶과 짧고 영웅적인 삶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그런데, 트로이인들 쪽에는 한 개인의 죽음을 넘어서는 집단적인 불행에 대한 강렬한 의식이 있다. 트로이가 사라질 운명에 놓여 있다는 의식 말이다.”


얇은 책 속에 펼쳐진 세계는 풍성하고 다채롭다. 안드로마케에게 보내는 헥토르의 작별인사, 참 슬프다. 역시 ‘영웅의 죽음’, 그 비장미는 시대 불문하고 보는 이의 가슴을 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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