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맥닐 (지은이) | 신미원 (옮긴이) | 이내주 (감수) | 이산 | 2005-09-30
맥닐이 Plagues and Peoples 를 1975년에 쓰고 1982년에 이 책, The Pursuit of Power 를 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나란히 ‘전염병의 세계사’ ‘전쟁의 세계사’라는 말로 나왔다. 무리 없는 제목이고, 어찌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 구미에 맞는 제목인 것 같기도 하다.
저자는 전작이자 대표작인 ‘전염병의 세계사’에서 병원균과 인간(숙주)의 관계를 ‘미시기생’으로, 피지배층과 지배층 즉 인간 간의 착취관계를 ‘거시기생’으로 표현했었다. ‘전염병의 세계사’는 미시기생에 관한 것이고, 구분하자면 ‘전쟁의 세계사’는 거시기생에 관한 것이다. 전자가 환경/생태와 인간의 관계를 다룬 것이었다면 후자는 전쟁무기를 소재로 삼아 물질문명의 역사 쪽을 들여다본다.
“인간에게 유일하고 중요한 거시기생체는 다른 인간, 즉 폭력행위의 전문가로서 자기가 소비하는 식량이나 생활물자를 스스로 생산하지 않고도 살 수 있는 종류의 인간이다. 따라서 인간들 사이의 거시기생을 연구하려면 그 연구대상은 단연 군사조직이며, 거기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전사들이 사용하는 다양한 장비의 변화이다.”
저자가 머리말에서 설명한 것은, 좀 억지스러운 해석같기도 하다. 이 책을 읽기 위해 ‘거시기생’이라는 개념을 꼭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책은 고대와 중세를 거쳐, 주로 유럽을 배경으로, 전쟁과 전쟁기술이 어떻게 서로 영향을 미치면서 발전해갔는지, 전쟁기술 및 장비의 발달과 전쟁의 상업화 과정을 뒤쫓는다. 적어도 중세까지는 ‘전쟁의 상업화’일 것이고 근대 이후로는 ‘산업화’가 될 것이다. 전쟁이 산업이 되는 과정은 전쟁 무기의 발달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고, 전쟁 무기의 ‘혁신’은 국가기구의 발달과 묶여 있다.
‘전염병의 세계사’와 연결되는 부분이 있다면 유럽에서 전쟁의 발발을 해당 사회의 인구 압력과 연결지은 부분인데 이 문제는 이 책의 중심 주제도 아니고, 크게 눈에 띄거나 재미있지도 않다. 이 책의 재미는 정치-경제-사회의 변화와 무기의 변화가 만나는 지점을 들여다보는 데에 있다. 특정 무기의 개량이 어떻게 전쟁 방식의 변화를 가져오는지, 그런 개량은 어떤 사회에서 가능했던 것인지, 그리하여 일견 사소해 보이는 무기의 개량이 전쟁의 양상을 어떻게 바꿔놓는지를 설명한다. 무기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는 나조차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맥닐 같은 유명한 역사학자한테서 잡학상식 류의 무기 얘기만 들어야 한다면 이 책을 아기다리고기다리고했던 의미가 없지! 책의 백미는 역시나, 맥닐이 보여주는 역사에 대한 통찰력이다. 고대와 중세 초기를 설명한 맨 첫 장을 넘기고 나면 두번째 장에서는 배경이 서기 1000년 무렵의 송대로 바뀐다. 문약했던 것으로 알려진 송의 수도 개봉, 그곳이 어떻게 ‘전쟁의 세계사’의 중심 무대가 되는 것일까.
역사가로서 저자의 통찰력이 빛을 발하는 것은 이런 부분이다. 11세기 이후 1000년간 서구의 확장과 발전의 근본적인 동력이 ‘중국의 부(富)’를 얻어내기 위한 과정이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맥닐은 ‘명령’과 ‘시장’이라는 두 가지 동원체계의 분기점이 바로 서기 1000년 개봉이었다고 지적한다. 여기서 ‘시장’이라는 말은 근대 이후의 자본주의를 설명할 때 혹은 요즘 우리가 글로벌화를 얘기할 때 쓰는 시장이라는 말과는 의미가 좀 다르다. 명령이냐 시장이냐 하는 것은, 사회의 권력관계가 신분구조와 억압에 의해 이뤄지느냐, 아니면 돈의 논리에 따라 이뤄지느냐를 말한다는 정도로 해두자.
저자는 1000년 전 개봉에서부터 세상은 후자, 즉 돈의 논리를 따르는 것으로 바뀌었다고 말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자본주의가 발흥하기 이미 1000년 전에, 세상은 힘이냐 돈이냐에서 ‘돈이 힘이 되는’ 세상으로의 구조적인 변화를 시작했다는 것이다.
“중국에서 비롯된 이 대현상은 시장에 의해 규제되는 행동양식을 문명세계의 여러 민족 사이에 유례없는 규모와 심도로 보급시켰다. 구시대적인 명령 일변도 사회의 통치자들은 사람들의 행동을 예전만큼 철저히 지배할 수 없게 되었다.”
물론 역사의 시간이 어느 지역에나 동일하게 흐른 것은 아니었다. 유럽에서는 근세 이후 시장의 지배가 세계 어느 지역보다도 빨리 사회를 변화시켰지만 중국에서는 “시장적 행동양식의 거센 불길이 시장에 적대적인 중국의 명령구조 자체를 녹여버리는” 데에 9세기라는 긴 시간이 걸렸다. “서유럽과 그 밖의 문명세계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는... 대규모 자본의 사적인 축적에 대한 억압(예를 들면 상공인들에게 적대적이었던 중국의 관료들과 같은)이 유럽에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저자는 전쟁 자체를 어떻게 바라보는가? 전쟁의 역사를 쓰는 사람에게 ‘당신은 전쟁을 좋아합니까’ 내지는 ‘그래서 당신은 전쟁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말입니까’라고 묻는다면 우문이다. 맥닐은 “전쟁을 비롯한 인간의 조직적인 폭력 행위에는 결코 지워버릴 수 없는 양의성(兩義性)이 있다”고 말한다. “한편으로 인간의 사회성은 전쟁터에서 일어나는 영웅적 행위나 자기 희생, 용맹을 통해 최고도로 발휘된다. ...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인명과 자산에 대한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파괴 행위는 현대인의 도덕의식에 깊은 혐오감을 불러일으킨다.”
오히려 그는 전쟁 자체보다는 대규모 전쟁이 일어나게끔 만드는 구조, 그 불합리성에 두려움을 갖고 있다는 편이 맞겠다. 어쩌면 이것이 사실은, 전쟁을 역사의 ‘필요악’으로 보는 많은 이들의 시각에 더 들어맞는지도 모르겠다.
“1884년에 정신없이 쏟아져 나왔던 기술혁명이 이처럼 가장 얄궂은 결과를 낳았다. 20세기 초 건함 경쟁의 수많은 다른 측면과 마찬가지로, 이 포격통제 논쟁 역시 다가올 시대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 기술이 제어되고 있지 않고 또 제어될 수도 없는 바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것과 같은 시대를 예시한 것이다. 가장 큰 역설은 모든 일을 합리적으로 경영하려고 하는 인간의 노력이 모든 개별적인 측면에서는 위대하고 인상적인 성과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 시스템 전체는 제어불가능한 방향으로 나아갔다는 점이다.” 특히 두 차례의 세계대전은 ‘합리성을 추구하다가 비합리성의 극단으로 나아간’ 대표적인 사례가 된다.
고도의 과학성, 합리성이 경직성과 비합리성을 낳게 되는 아이러니. 그리하여 서기 1000년 개봉에서 시작된 변화는 ‘합리적인 국가경영’이라는 명제와 결합돼 ‘모든 사회의 군수화, 모든 전쟁의 산업화’를 불러왔고 전쟁산업을 모태로 한 국가주의라는 리바이어던을 낳았다는 것이다. 전시 동원으로 시작돼 군비경쟁으로 치달은 20세기는 그런 시대였다.
맥닐은 대량생산과 서구의 눈부신 경제발전에서 되살아난 ‘명령’의 망령을, ‘명령’이라는 동원수단을 다시 불러냄으로써 더욱 강하게 세상을 쥐어짜내는 ‘시장’의 위력을 본다. ‘결론’이라는 제목의 마지막 장에서 그는 결론 대신 SF 한 편을 선사한다. 세상이 어떻게 변해갈지, 고도의 합리성과 총체적인 비합리성이 우울하게 결합돼 우리를 계속 옥죌 것인지는 미지의 상태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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