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네 책방

술탄 살라딘- 에로비안 나이트

딸기21 2005. 5. 2.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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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탄 살라딘 The Book of Saladin (1998) 

타리크 알리 (지은이) | 정영목 (옮긴이)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05-01-15


몇해전(그러니까 벌써 오래전...인가) 한 스포츠 신문에 `에로비안 나이트'라는 연재코너가 있었다. 에로비안 나이트... 아라비안 나이트를 발음만 패러디한 것 같지만, 내용 면에서도 (글쓴이의 의도와 별개로) 정곡을 찌르는 문구다. 

아라비아의 밤은 원래 에로틱하다. 기본적으로 `나이트'는 `에로틱' 한 건데, 왜 특히 아라비안 나이트는 에로틱하다고 하나? 이유야 있다. `아라비안 나이트'는 진짜 에로틱...이라기보단 사실 엽기 수준의 이야기 모음이 아니던가. 

가장 먼저 접했던 아라비안나이트는 삼성당에서 나왔던 컬러풀한 책이었다. 그림이 얼마나 이뻤던지! 지금 유추해보면 아마도 외국 그림책을 베껴온 것이었을 듯. 아무튼 그림이 느무느무 이뻤다(당시의 내 눈에 그렇다는 얘기다- 지금 다시 보면 어떨까?). 물고기가 된 사람들, 미녀 누르니할 이야기...(여담이지만 내 책엔 `누르니할'로 돼있었고, 오빠가 갖고 있던 계몽사책엔 `누르하르니하르'라고 되어있어 헷갈렸다) 

다시 에로...이야기로 돌아가면- 뒤에 버튼판 천일야화를 읽으면서 내가 받았던 느낌은, 설명하기가 좀 힘들다. 얼마나 기괴했는지. 대략 중학생 무렵이었던 것 같다. 돌이켜보면 난 그때 그 책의 `코드'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책의 첫머리에 왕비랑 붙어먹은 것으로 나오는 `검둥이들'이 어떤 성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던 것인지, `남자들 반지를 모으는' 바닷가 괴물 동반 여인의 사연은 또한 어떤 내막을 품고 있는 것인지 나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어쨌든 그때 읽은 아라비안나이트는 끔찍했다. 왜 끔찍했느냐. 검둥이와 괴물의 이미지가 끔찍해서? 그것도 답은 답이다. 순수의 화신이었던 내게, 그 망측한 이미지들이 끔찍했던 것은 당연하다!
 

순수의 화신이던 나, 서른 다섯 아줌마가 되어 `에로비안 나이트'를 재미나게 읽다! 

처음에 타리크 알리의 이름을 보고 책을 샀다. `근본주의의 충돌'을 통해 내가 접한 타리크 알리라는 인물은 뉴레프트리뷰의 편집장, 파키스탄 출신의 비무슬림 중동전문가, 반미 반이슬람 지식인이었다. `술탄 살라딘'을 처음 펼쳐보고, 나는 이 책의 저자가 타리크 알리와 동명이인인 줄 알았다. 그런데 동일인이었다! 이 사람, 이제보니 진짜 웃기게 대단하잖아... 국제정치평론가로도 훌륭하지만, 이렇게 타고난 `이야기꾼'인지는 몰랐다. 

라픽 사미의 `1001개의 거짓말'에는 사막에 `이야기'가 많을 수 밖에 없는 이유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사막엔 이야기가 많다. 무릇 `이야기'에는 영웅과 여인들이 등장하고, 모사가 나오고, 변사풍 나레이터가 수다를 떤다. 

`술탄 살라딘'은 그런 `이야기'다. 살라딘이 영웅도 100%의 인물이라면, 시르쿠(살라딘의 숙부) 처럼 영웅도가 좀 떨어지는 인물들이 고루고루 등장한다. 자밀라와 할리마라는 개성 강한 여인들은 구중궁궐 속의 영웅들이다. 잔소리쟁이 늙은이와 젠체하는 학자, 그리고 (아마도 저자가 의식적으로 부각시켰을 것이 뻔한) 유대인 나레이터가 등장한다. 술술 흘러가는 이야기라 하기엔 사실 한 문장 한 문장이 치밀한 `계산'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가장 좋았던 것은 이 책이 그야말로 에로비안 나이트라는 점이다. 벌써 한 10년전부터였나, 문화평론 내지 영화평론 하는 사람들은 죄다 `발칙한' `발랄한' 이런 말로 글마다 도배질을 해서 짜증이 났었는데 (`발칙한 상상력' 어쩌구 하는 표현들) 이 책은 말 그대로 `발랄한 에로티시즘'을 선보인다. 

저자는 타리크 알리, 역자는 정영목. 알려진 저자에 알려진 역자. 무게없는 책은 아니다. 제목도 거창하게 `술탄 살라딘'이다. 그런데 요리조리 야한 소리, 상스런 표현이 넘쳐난다. 대체 `**', `씹하다' 이런 말들은 영어 원본엔 뭐라고 적혀있었는지가 궁금하다. 꽤나 알려진 저 번역자라면, 아마도 원작의 어감을 살리기 위해 굳이 저런 단어들을 골랐을텐데 말이다. 영어가 짧은 나로서는 상상이 되지 않아 안타까울 뿐이다.
 

사막은 원래 신기루같은 이야기가 넘쳐나는 곳이라 하고 아랍 남자들은 정력 쎈 걸로 유명하니, 이런저런 사정들이 겹쳐서 `natural born 에로티시즘'이 된 걸까(술탄 살라딘은 산악지대의 거센 쿠르드족이니 정력이 진짜 끝내줬을지도 몰라). 게다가 줄줄이 이어지는 동성애의 행렬, 그것은 과연 인간의 본능이런가... 두둥. 

아라비안 나이트의 핵심은 에로이고, 난 위대한 술탄의 이야기를 에로소설로 읽었다. 그래서 무지무지 재미있었다. 아직껏 중동에 대한 책들을 보면서,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는 아주 중요한 코드 중의 하나를 놓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이 책의 에로티시즘을 그렇게 받아들였다. 음침하지 않은, 문화의 일부분(하긴 어느 나라나 민담엔 야한 구석이 많겠지만)으로서 이들의 에로티시즘을 다시 보게 돼 기쁘고 뿌듯했다(음... 좀 오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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