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네 책방

역사서설- 서평 대신 느낌표

딸기21 2005. 5. 16. 15:46
728x90
역사서설 al-Muqaddimah
이븐 할둔. 김호동 옮김. 까치글방



(이 책에 대해서 감히 서평 같은 걸 쓸 용기는 없다. 그러므로 이 글은 그냥 느낌을 나열하는 것으로 만족하려 한다) 

'오래된’이라는 말이 주는 울림 같은 게 있다. 오래된 도시, 오래된 이야기, 오래된 책.


오래된 책을 읽고 싶었다. 그래서 고른 책 한권, 이븐 할둔의 역사서설. 14세기에 쓰였으니 이 정도면 누가 뭐래도 오래된 책에 속한다.

오래된 책을 읽는 즐거움, 오래전에 벌어진 신기한 이야기들을 듣는 즐거움, 그리고 지금과 똑같은 인간 군상들을 보면서 변치 않는 무언가를 확인하는 즐거움. `역사서설'은 그런 즐거움을 준다. 중세 이슬람의 이야기. 다마스커스나 알레포라는 말처럼, 마그레브라는 말에서도 묘한 향기가 난다. 둥근 지붕을 얹은 궁전, 뾰족탑이 늘어선 모스크, 향료상인들이 누비고 다니는 오래된 도시의 뒷골목 같은 분위기.

중세 이슬람 석학이 들려주는 문명론. 세상에 대한 통찰력. 문명이란, 도시란, 경제란, 예술이란, 건축이란, 직업과 기술이란...이븐 할둔은 아랍 세상에 국한되지 않는 광범한 문명론을 통해 후대 사람들을 무안케 만드는 통찰력을 보여준다.

이윤은 노동에 의해서 실현된 가치이다. 더 많은 노동이 투여되면 거기서 실현되어 사람들이 소유하게 되는 가치도 증대되고 이윤도 필연적으로 증대된다. 

…문명을 파괴시키는 데에 가장 결정적이며 불의 가운데에서도 가장 심각한 것은 백성들에게 부당한 임무를 부과하고 그들을 강제노동에 동원하여 이용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까닭은 노동이 자본을 구성하는 것이고, 소득과 생계는 문명인에 의한 노동가치의 실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노력과 각종 노동을 통해서 자본을 획득하고 이윤을 창출한다. 그들에게 노동이 아니고는 달리 이윤을 창출할 방법이 없다.

…만약 이윤이 기술 이외에 다른 무엇인가와의 결합의 결과라고 한다면, 그렇게 해서 생긴 이윤과 획득자본의 가치에는 거기에 투입된 노동의 가치도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노동이 없다면, 그런 가치는 얻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경우 이윤에서 차지하는 노동의 몫은 명백히 확인되며, 많든 적든 가치의 일정 부분은 노동으로부터 발생한다. 그러나 노동이 차지하는 부분이 은폐될 수도 있다.

맑스가 울고 가겠다.  

사실 할둔은 굉장히 유명한 사람이고, 이 책 또한 굉장히 유명한 책이다(기껏 `굉장히 유명한' 따위의 수식어나 붙이고 있으려니 무안하긴 하다). 국내에서 `역사서설'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이 책은 그의 역작인 `성찰의 책'의 앞부분에 해당되는 것으로, 한국어판 제목은 번역자가 붙인 것이다.

할둔 매니아를 할두니언이라 부를 정도로 대단한 역사가이지만 국내에선 2003년에야 번역됐다. 서울대 김호동교수의 ‘사명감’이 곳곳에서 보인다. 책은 아랍어책 직역이 아니라 영어본을 중역하고 일어본으로 보완했다고 하는데, 책 뒤에 할둔의 생애와 역사사설 평가 등을 충실하게 붙여놨다.

서양의 무슨무슨 책 안 읽었다고 하면 어쩐지 무식쟁이 취급을 받는 것 같아서 지레 주눅이 든다. 서구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에 모두들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거기서 조금만이라도 어긋나면 남들이 다 이상하게 생각한다. 

사실 이런 책, 누가 사서 읽을까. 서문만 묶은 것이라지만 그래도 두껍다. 각주가 빽빽하고, 내용은 어마어마하다. 주제는 크고 각론은 우리가 잘 모르는 아랍과 마그레브에 대한 것들이다. 그래도 할둔의 문명론을 접하게 된 것은 좋은 경험이었다. 단순히 `비 서구인이 바라본 세상'을 엿볼 수 있었다는 것을 넘어, 할둔 사상 그 자체로 의미도 있고 재미도 있었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