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인샤알라, 중동이슬람

[이라크]12일, 만수르바자에서.

딸기21 2003. 3. 12.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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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수도 바그다드는 평온하고 일상적인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모래바람 부는 겨울이 끝나고 날씨가 더워지기 시작했다. 가벼워진 옷차림만큼이나 거리는 활기가 있어 보였다. 가게에는 여전히 상품이 부족하고 생필품은 값싼 중국산으로 충당하는 '가난한 생활'이 계속되고 있었지만 바그다드 시민들은 미국의 위협에 '단결'이라는 유일한 무기로 맞서기로 한 것처럼 보였다.

한국에서 온 국회의원 일행과 함께 옛 시가지 중심가에 있는 만수르 바자(시장)에 들렀다. 옷가지와 신발 따위를 파는 가게들과, 관광객들을 위한 기념품 가게들이 몰려 있다. 동남아 등지에서 만들어진 싸구려 양탄자와 조악한 공예품들을 파는 상점가에는 상인들이 나와 호객을 하고 있었지만 외국인 관광객은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골동품 가게 한 곳을 찾아 들어갔다. '부르는 게 값'이고, 깎으면 또 '깎는 것이 값'인 아라비아식 흥정을 하는데, 통 손님들이 없는 탓인지 상인들이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김성호의원과 함께 기념품 가게에 들어가서 셰라자드의 그림이 그려진 접시 한 개를 샀다. 돈은 김의원이 냈다^^ 김의원이 접시 두어개를 사면서 가게 주인에게 60달러나 냈는데, 분명 바가지다. 김의원은 "자선한 셈 치지, 뭐."라고 했다. 맞는 말이다.

시장을 나와 차를 타러 가는데 키가 내 반도 안 되는 어린 여자애 하나가 우리 일행을 졸졸 따라다니고 있었다. 안영근 의원 말로는, 여자애가 초콜렛을 내밀더란다. 그래 돈을 줬는데 마음이 안 됐어서 초콜렛도 다시 돌려줬더니 한사코 안 받는단다. 계집아이가 갖고 있던 검은 비닐봉지를 뒤져보니 잡동사니 몇 개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내가 보기에는, 초콜렛 파는 아이는 아닌 것 같았다. 아마도 호기심 때문에 따라다닌 건지도 모르겠다. 땟국물이 졸졸 흐르는 얼굴이 얼마나 이쁜지. 송영길의원이 여자애랑 사진 한 장 찍으려고 했는데 도망을 치면서 내 뒤로 숨었다. 그래서 내가 아이를 붙잡고 웃으면서 같이 섰더니 그제서야 사진을 한 장 찍도록 '허락'해줬다.

시장 외곽에는 바그다드의 명물인 어른 베개만한 '다질라(티그리스강의 현지 이름) 잉어'를 파는 노점상들이 줄지어 있었다. 올리브와 오렌지, 메론 따위를 진열해놓은 수레들도 보였다. 시장과 맞닿아 있는 바그다드국립박물관 앞에서는 견학온 아이들이 교사의 손짓에 맞춰 "만수르 바그다드(위대한 바그다드), 우리의 지도자 사담을 사랑합니다"라는 구호를 연호했다. 바그다드 국립박물관은 워낙 유명한 곳이어서 잔뜩 기대를 하고 들어갔는데 허당이었다. 되지도 않는 마네킹들을 갖다놓고 민속박물관이라며 보여주는데 영 아니었다.

시민들은 '사담 후세인'과 '승리'를 주문처럼 외우고 있었다. 아이들을 이끌고 온 교사 시나(30)는 "우리 지도자는 강하다"면서 전쟁에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고 말했다. 양장 차림에 스카프를 두른 여고생 셀와(16)는 낯선 외국인의 질문에 수줍어하면서도 "우리 지도자를 사랑한다"는 부분에서는 대답에 힘을 주었고, 영어를 잘 하는 신세대 여성 제이나 무사(24)는 "미국이 우리를 공격한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지도자를 믿는 것 뿐"이라고 말했다. 미국의 위협은 오히려 국민들을 묶어주는 힘인 듯했다.

바그다드가 평온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미국의 오랜 위협에 단련될대로 단련된 탓에 현 상황을 특별할 것 없는 국면이라 보는 탓도 있지만, 경제적 기반에서 근본적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이라크는 1990년 이후 계속된 유엔 금수조치로 경제가 피폐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자급이 어느 정도 가능한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농산물 외에 의료품처럼 자체생산이 불가능한 품목들은 유엔의 석유-식량 교환계획에 따라 일부 반입되고, 모자라는 것들은 요르단 등지로부터 비공식적 지원을 받고 있다. 

특히 배급체제가 원활히 작동되고 있다는 점을 눈여겨볼만 하다. 구호식량 배급을 관리했던 전직 유엔관료 데니스 할러데이는 지난해 영국 가디언지 인터뷰에서 "이라크의 배급시스템은 대단히 훌륭하다"면서 "식량과 의약품이 적재적소에 전달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오랫동안 '전시(戰時) 경제'로 운영돼 왔는데도 중간관리들의 부패나 횡령이 별로 없다는 것. 사담 후세인 정권이 국민들의 지지를 받는 것은, 강압통치와 우상화 정책의 탓도 있지만 이처럼 기본 생계를 보장해주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모하메드 메디 살리 통상장관은 12일 기자회견을 갖고 "생필품 공급은 원활히 이뤄지고 있다"고 밝혔는데 국민들을 안심시키기 위한 목적도 있지만 실제로 아직까지는 별다른 동요가 없어 보였다.

역설적이지만, 전쟁의 위기감을 두드러지게 보여주는 것은 반전시위와 반전운동가들의 움직임 정도였다. 이날 바그다드 시내 혁명광장에서는 수천명의 시민과 반전운동가들이 참여하는 시위가 열렸다. 이라크 제재에 반대하는 활동을 펼쳐 노벨평화상 후보에까지 올랐었던 미국의 반전운동가 캐시 켈리가 이끄는 이라크 평화팀(Iraq Peace Team)과 인간방패 자원단(Human Shields) 등 각국에서 몰려든 반전운동가들이 시내에서 전날 유엔 구호기관 관리들이 이라크를 빠져나간 것에 항의하는 집회를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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