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인샤알라, 중동이슬람

유씨프 신부님과의 대화.

딸기21 2003. 3. 13. 11:12
728x90

에삼과 함께 시내를 돌아다녔다. 주무리야 거리의 책 시장에 갔었다. 길거리에 노점상들이 헌 책을 판다. 나는 꾸란 두 권과 꾸란을 담기 위한 종이가방, 나자프와 케르발라의 사원들이 조잡하게 그려져 있는 카드 한 벌을 샀다.

오늘은 아슈라 모하람(이슬람력 1월 10일)이다. 8세기에 케르발라에서 무하마드의 사위 알리와 손자 후세인이 반대파들에게 처형당한 날이다. 시아파들은 이 날을 최대 추모일로 치고, 순니파들도 이 날을 기린다. 국경일이어서 거리는 한산했다. 에삼과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점심을 먹었다. 이라크 음식들 사진도 한 장 찍었다.

Instagram, @baghdadartgallery

에삼이 우연히 생각났다면서 자기가 이 곳 기독교 교회가 어디 있는지를 안다고 했다. 당장 가자고 했다. 와흐다 거리에 갔더니 도미니칸 성당과 학교, 사제관을 겸한 수도원 건물이 있었다. 용케 신부님을 만나 저녁에 오기로 약속을 잡았다.

언로가 철저하게 통제된 이라크에서 역설적이지만 카톨릭은 미약하게나마 '민주주의'를 이야기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다. 인구의 97%가 무슬림인 이슬람국가에서 카톨릭은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30만명에 이르는 기독교도들은 대부분 이라크의 중산층을 형성하고 있으며, 이라크 카톨릭을 이끌고 있는 유씨프(54) 신부님의 지도 아래 하나의 집단을 이루고 있다. 
늦은 저녁 사제관에서 만난 신부님은 여전히 평상복이 아닌 사제복 차림이었다. 이라크 전역에 사제가 6명 밖에 없기 때문에 매일 미사를 집전해야 할 뿐만 아니라 강연과 교육활동, 언론 인터뷰 등으로 몹시 바쁘게 지내시는 듯했다. 이라크 지도를 배경으로 한 성 도미니크의 그림이 신부님 방 벽에 걸려 있었다.

이라크에서 카톨릭은 소수파인데 차별은 없는지 물었다. "어디에서나 미노리티들은 자신들이 차별받는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이 정권은 세속정권입니다. 정말로 차별은 없습니다."

"기독교도인 조지 W 부시 미국대통령이 당신의 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하려 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신부님은 "부시의 신앙에 대해서는 부시에게 물어보라"며 웃으시더니 잠시 뒤 정색을 하고 말을 이었다. "정말로 신앙심을 가진 인간이라면 전쟁을 하지 말아야지요. 교회에서 신도들은 하느님 앞에 '내 탓이오', '죄인입니다'라고 기도합니다. 미국은 스스로를 선(善)의 축(Axis of Good)'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 스스로를 '선'이라고 감히 선언할 수 있습니까.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모르지만 언론에서 우리는 날마다 virtual war를 경험합니다. 미디어전쟁의 측면이 강하다고 봅니다."

'문명의 충돌'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신부님의 말이 더욱 단호해졌다. "새뮤얼 헌팅턴은 책 제목을 '경제의 충돌(Clash of Economies)'이라고 바꿔야 할 겁니다.   우리가 자원을 많이 갖고 있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죠. 석유는 우리에게 저주입니다. 전세계에서 천만명이 반전시위를 벌였습니다. 이번 전쟁이 석유전쟁이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사담 후세인 정권은 어쨌든 독재정권이 아니냐고 묻자 신부님은 "이라크가 세계에서 유일한, 혹은 가장 심각한 독재국가인가요"라고 되물으면서 북한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북한의 독재자 김일성에 대해 들어 알고 있습니다. 미국은 북한도 악의 축의 하나로 지목했죠. 그들은 당신의 형제입니다. 미국이 북한을 공격하면 좋겠습니까?"

이라크 사람들이 북한 문제를 거론하면 나는 할 말이 없어진다. "중국도 독재국가이지만 지금 자신들의 손으로 조금씩 변하고 있지 않습니까. 물론 소련이나 유고처럼 스스로 붕괴한 나라들도 있고요." 신부님은 "총과 폭탄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고 했다. "독재를 민주주의로 바꾸고 싶다면 대화나 외교 같은 정당한 방법을 택해야 합니다. 우리도 변화를 원합니다. 그러나 폭탄에 의한 변화를 바라지는 않습니다. 100만명, 200만명을 죽이고서 '이라크인들을 위한 전쟁이었다'고 말하면 누가 믿겠습니까."

신부님은 책장을 열고 걸프전 때 사제관에 떨어졌던 폭탄 파편을 꺼내 보여줬다. 바그다드 시민의 60%가 도시를 벗어났던 그 때, 지붕 위로 폭탄이 떨어지던 순간에도 신부님은 사제관을 떠나지 않았다. 이번에 전쟁이 일어나도 역시 사제관을 지킬 생각이다.

이라크 제2의 도시인 북부의 모술에서 태어난 신부님은 프랑스에 유학해 신학과 민속학을 공부했다. 바그다드에서 20년째 사제 생활을 하고 있는 신부님은 '변화'에 대해 많은 얘기를 하고 싶어했다. "유럽은 하나가 되어가고 있다지만, 옛 유고연방은 무려 10개 나라로 갈라졌죠. 옛 소련 공화국들과 동유럽 국가들을 보십시오. 갑작스런 변화는 사람들에게 고통을 줍니다."

그러나 후세인 정권 하에서 아래로부터의 개혁을 이뤄내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신부님은 그 질문에 대한 대답 대신 한국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50년전 한국전쟁은 외부에서부터 닥쳐온 이데올로기의 충돌이었죠. 그 때 남한과 북한은 서로 다른 체제를 선택했습니다. 남한은 대단히 잘 해온 것 같습니다. 30년전에 한국은 매우 가난했지만, 지금은 '젊은 민주주의'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중국이나 인도의 '늙은 문명'에 비해 훨씬 역동적인 변화를 경험한 것 같습니다. 이 곳의 사정은 복잡합니다. 사회 전체를 바꾸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우리는 전쟁과 폭력 없이 그 일을 하고 싶은 겁니다. 갑작스런 변화는 국민들을 고통스럽게 만듭니다." 신부님은 중국과 인도만큼이나 '늙은 나라' 이라크가 또다시 피를 흘리는 것을 못 견뎌하셨다.

그렇지만 구체적인 방법이 있을 리 없다. 신부님은 '이웃'을 바꾸기 위해서는 생각을 나누는 방법 밖에 없다고 강조했지만 조금은 무력하게 들렸다. 신부님이 미사를 집전하는 것 외에 가장 역점을 두고 있는 것은 잡지를 내는 일이다. 도미니크수도회에서 매달 발간하는 '알 피크르'라는 잡지는 40만명의 독자를 갖고 있다고 했다(알 피크르가 무슨 뜻이었는지 여쭤보는 걸 잊어서 기사 쓰면서 머리를 쥐어박았는데, 나중에 암만에서 만난 최창모 교수님이 '사상'이라는 뜻이라고 일러주셨다. 다시 한번 머리를 쳤다). 30만부는 카톨릭신도들에게, 10만부는 무슬림들에게 배달된다. 
 
"무슬림들이 우리 잡지를 보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그들이 말하지 못하는 것을 우리가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바깥 세계의 소식들, 도덕적인 문제들 같은 여러 가지 주제를 다루죠. 생각을 나누는 유일한 방법은 창(窓)을 열어놓는 것입니다."

신앙심으로 전쟁에 대한 공포를 모두 이겨낼 수 있는지 물었다.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신부님의 대답도 다른 이라크인들과 똑같았다. 
 
"미국이 이라크인들 머리 위로 핵폭탄을 떨어뜨린들, 아무도 뭐라 하지 않을 겁니다. 이라크인들은 다 죽고 난 뒤 일 것이니까요." 신부님은 이라크 어린이들의 상황을 얘기했다. "매우 안 좋습니다. 해마다 10만명씩 죽어갑니다. 매들린 올브라이트는 이라크 어린이들의 희생은 이라크가 치러야할 '대가(price)'라고 말했었죠. 석유를 위한 대가인가요, 아니면 '세계화'의 대가인가요? 무엇을 위한 대가인지는 모르지만, 어른들이 저지른 짓의 대가인 것은 분명합니다."

전쟁을 막기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지난달 교황 요한바오로2세의 특사가 이라크를 방문해 '반전 미사'를 집전했다. "교황이 바그다드를 찾는다면 좋겠지만, 세상은, 특히 미국의 주요 언론들은 평화주의자들의 행보에는 별 관심이 없더군요." 
 
신부님은 지난해말 미국을 들썩이게 했던 미 카톨릭 사제들의 추문에 대해서도 언론이 전쟁을 앞두고 교황의 입을 막기 위해 여론조작을 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었다. 이번 전쟁은 그야말로 '미디어 전쟁'이고, '프로파간다 전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세계 1000만명이 반전시위를 벌인 것은 분명 그에게 희망이 되고 있는 듯했다. 

"한국의 김수환 추기경님께 이라크인들을 위해 기도해달라고 전해주십시오. 이라크인들 모두가 고맙게 생각할 겁니다."

그리고 나서 신부님은 아람어 성경을 꺼내 보여주셨다. 나는 "아직도 아람어를 쓰는 사람들이 있는 줄은 몰랐다"고 했다. 이라크 카톨릭교도 중에는 아직도 아람어를 쓰는 사람들이 있단다. 신부님의 부모님도 아람어를 쓰셨다고 했다. 내 눈에는 아람어나 아랍어나 글자 모양은 비슷하게 보였다. 나는 신부님께 후세인 정권의 역사 유적 파괴에 대해 물었다. "작년에 바빌론과 사마라에 갔더니 후세인 대통령이 유적 위에 새 건물을 짓고 있더군요."

신부님도 그것에 대해서는 통탄해했다. "이라크에 유적이 몇 군데인지 아십니까? 무려 50만개예요, 50만개. 시카고대 발굴팀이 낸 자료에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그것을 파괴하는 것은 정말 가슴아프지요. 모두 무지에서 비롯된 일입니다."

나는 호텔에 돌아와서 신부님이 오래오래 사시도록 빌었다. 오늘은 신부님의 신에게 기도를 했다. 이번 전쟁에서도 살아남으셔서 이라크가 새롭게 변하는 모습을 보셔야 할텐데.

--

신부님께서 오래오래 사시길 바랬는데.

내 뒤에 박노해 선생님과 라꼬군이 신부님을 방문했었다. 라꼬군 방문 때, 신부님께서 내 글을 (박선생님 통해 건네받아) 갖고계시단 얘기 듣고 기뻐했었다.

신부님은 2004년에 심장 질환으로 돌아가셨는데, 나는 그 소식을 2006년 말에야 들었다. 눈물이 많이 났다. 2년이나 지나 명복을 비는 처지가 됐지만, 신부님 하늘에서 평화를 누리시리라 믿는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