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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시아파 사원 방문기 (1)

딸기21 2002. 10. 16. 14:55

원래 모스크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이라크에 있는 동안 여러곳-정확히 말하면 7군데의 모스크를 돌아다녔다. 앞서 쓴 바 있는 바그다드의 카디미야 황금돔사원과 바라싸의 시아파 사원, 명성 높은 칼리프인 하룬 알 라시드의 부인 주베이다가 잠들어 있는 셰흐마루프 모스크에 들렀고 또 사마라의 칼리프 사원에도 갔었다.

바그다드의 알 카디미야 황금돔 사원
  
그러나 역시 가장 아름다웠던 건 시아파 지역인 케르발라, 나자프의 사원들이었다. 사실 말은 <시아파 지역>이라고 했지만 이라크에서는 시아파가 다수이고 순니파가 더 적다. 그런데 후세인 정권이 굳이 따지자면 순니파이기 때문에 시아파 지역 운운하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남부에는 특히 시아파들이 주를 이루고 있는데 남부 중심도시 디와니야의 시아파들은 1991년 걸프전 때 후세인 정권이 위기에 몰리자 반란을 일으켰었다. 오랫동안 정부의 탄압을 받았던 시아파 반란군은 집권 바트당 간부들을 처형하고 일부는 약탈을 자행하기도 했다. 

후세인 정권은 반란군들이 숨어 있는 나자프와 케르발라의 사원을 탱크로 공격해 결국 진압했다. 정부군이 내건 슬로건은 "오늘 이후로 시아파가 존재하지 않게 만들겠다"였다고 하니, 무력진압이 얼마나 잔혹했을지를 상상할 수 있다. 게릴라들은 진압돼 마쉬의 땅(Marshland)라고 불리는 늪지대로 흩어졌는데, 요즘도 산발적인 저항을 벌이고 있다고 한다.

나자프와 케르발라에 가는 날도 바람이 몹시 많이 불었다. <가이드> 없이 가고 싶어서 요리조리 눈치를 보다가 한국 대사관에서 택시를 불렀는데, 결국 정보부 직원 유씨프가 따라붙었다. 결과적으로는 유씨프와 함께 다닌 것이 잘한 일이었다. 시아파 지역은 아무래도 바그다드보다는 치안이 불안정할 수 있고, 틈틈이 검문을 받아야 하는데다 또 사원을 드나들 때에도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은 나자프의 이맘 알리 사원. 너무 아름다웠다. 사원 주변에는 시장이 있었지만 한눈에 보기에도 바그다드보다 훨씬 가난해보였다. 찢어지게 가난한 시골 읍내, 모래바람에 덮힌 무덤들을 지나 모든 것이 모래빛인 곳에 화려하기 그지없는 사원이 있었다. 


오기 힘든 곳에 왔다는 뿌듯함 플러스, 내가 방문한 곳의 사람들에 대한 애정을 갖고 보지 않으면 모든 것이 사실 부족하고 지저분한 곳이 이라크다. 출발하면서부터 유씨프와 운전기사에게 "나는 무슬림"이라고 했더니 몹시 반가와하면서 성실하게 안내해주었다. 그 전까지는 각종 시설에 들어갈 때 유씨프가 나를 "코리안 저널리스트"라고 소개했었는데, 이날은 가는 곳에서마다 "코리안 무슬림"이었다.


가이드를 따라 모스크 안에 들어갔다. 무슬림의 5대 기둥이라고 부르는 일종의 의무사항들이 있는데, 샤하다(신앙고백) 싸움(단식) 살라트(예배) 자카트(헌금) 하지(성지순례)가 그것들이다. 전통적으로 자카트는 경제권을 갖고 있는 남자들이 한다. 모스크 안의 너른 방에 남자들만 있길래 "무엇을 하는 곳이냐"고 물었더니, 살라트를 하고 있다고 했다. 왜 여자들은 없냐니까, 살라트는 기본적으로 자카트를 하는 남자들이 하는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반대편 방에는 여자들만 모여있었다. 유씨프에게는 기다리라 하고 그 방으로 들어갔다. 말이 방이지, 사실은 양 옆이 모두 뚫려 있는 복도의 한 부분인데 여자들이 아바를 쓰고 앉아 기도를 하고 있었다. 자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이란이나 파키스탄에서 온 순례객들이란다. 나도 앉아서 조용히 기도를 올렸다.

케르발라에는 아바스의 모스크와, 후세인의 모스크가 있다. 케르발라는 시아파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성지(聖地)다. 위대한 예언자 무함마드에게는 파티마라는 딸이 있었는데, 무하마드 사후에 한동안 계승권 싸움이 있었다. 파티마의 남편, 즉 무함마드의 사위인 알리가 뒤를 이어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들이 있었던 반면에 무함마드의 친구였던 아부 바크르를 추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교권을 둘러싼 투쟁에서 승리한 것은 후자, 즉 오늘날의 순니파였다.


알리는 첫번째로 무슬림이 된 사람들 중 하나였고, 무함마드와 함께 모든 전쟁에 참가했던 인물이다. 무함마드의 사위이자 사촌이기도 하다. 무함마드의 가문, 즉 <예언자 가문(알 바이야트)>을 추대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이들(훗날의 쉬아파)은 교권 싸움에서 졌지만 처음에는 양쪽 사이에 직접적인 충돌은 없었다. 

그러다 두 파가 부딪쳤던 것은 케르발라에서였다. 우마이야 왕조를 세운 무아위야라는 칼리프가, 7세기 말에 자기 아들 야지드를 후계자로 내세우고는 충성서약을 받아냈는데 뒤에 야지드가 집권한 뒤 알리의 둘째아들인 후세인이 이를 관행에 위반된다며 비판한 것이다. 아직 부자상속이 정착되지 않은 시기의 일이다. 야지드는 군대를 보내 케르발라에 머물고 있던 후세인과 가솔들을 공격했다. 어린아이와 여자들을 뺀 성인 남자들은 모두 죽었다. 


특히 후세인이 몸이 두 동강이로 잘리는 참혹한 죽음을 맞았다는 사실은 반 야지드세력의 거센 분노를 자아냈다. 이 <케르발라 참극>은 쉬아-순니가 분리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참극이 벌어진 날을 <아슈라>라고 하는데, 쉬아파가 다수를 차지하는 이란에서는 모든 무슬림의 가장 중요한 기념일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