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인샤알라, 중동이슬람

[이라크]사마라의 탑

딸기21 2002. 10. 14.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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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라(Samarra)에 갔던 날은 바람이 많이 불었다. 

사마라는 바그다드 북쪽 120km, 자동차로 2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에 있다. 마을 없는 초지를 지나, 타리크가 모는 밴을 타고 갔다. 나를 맡은 <가이드>인 사멜이 동행했다. 

 

사마라에는 유명한 미나레트(사진)가 있다. 원래 미나레트는 모스크 옆에 있는 망루같은 것인데, 예전에는 미나레트에 사람이 올라가 큰 소리로 기도시간을 주변에 알렸다고 했다. 

 

나는 모스크에는 4개의 미나레트가 있는 것이 정석(定石)이라고 들었는데, 이라크의 모스크들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미나레트가 4개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물으면 사람들은 "카디미야의 모스크에는 4개가 있다"면서 자랑스럽게 대꾸한다. 바그다드 시내에 있는 카디미야의 황금돔사원을 말하는 것인데, 이 사원 외에 남부의 어느 모스크인가가 미나레트 4개를 갖추고 있을 뿐, 나머지는 2개 혹은 1개만 갖고 있단다.



사마라의 미나레트는 달팽이처럼 생긴 나선형 구조로 유명하다. 미나레트라고는 하지만 여느 모스크의 첨탑과는 생긴 것이 완전히 다르다. 현지사람들은 미나레트라는 일반적인 명칭 대신 <말위야(Malwiya)>라고 부르는데, 그것이 저런 양식의 탑을 가리키는 것인지 아니면 저 탑의 고유명사인지는 잘 모르겠다.

사마라는 9세기에 한때 압바스 왕조의 수도였던 곳이다. 당시 칼리프(왕)였던 알 무르타심은 무능한데다, 운명론자였다(나는 무능함과 운명론을 한데 놓고 보는 버릇이 있다). 왕조 초기의 진취성은 사라졌고, 국력은 쇠퇴했다. 이 무능한 왕이 택한 것은 바그다드를 떠나 수도를 옮기는 것이었다. 알 무르타심은 사마라에 새 도시를 만들었는데, 사마라는 <보는 사람이 즐겁다>는 뜻이라고 한다. 그때 모스크와 사마라의 탑을 만들었다. 

 

탑 옆에는 탑의 주인으로 보이는 사원이 있는데 그냥 <칼리프 모스크>라고 만 불린다. 아마도 그 이름 속의 <칼리프>는 알 무르타심을 가리키는 것 같다. 지금은 외벽과 터만 남아있는데, 새 사원을 짓기 위해 옛 터에 철심들을 박아넣고 있었다.

 

높이 52m. 숫자로 하면 감(感)이 잘 오지 않지만, 평지에 혼자 우뚝 서있는 탑은 아주 거대하다. 높으면서도 위압적이지 않고, 뭔가 아슬아슬하고 신비한 일이 있지 않을까 하는 느낌을 주는 그런 존재다. 내가 올라갈 때에는 우리 일행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선형 계단에 들어서는데 타리크와 사멜이 이구동성으로 "조심하라"고 했다. 왜 그러나 했더니, 바깥쪽 난간이 없는데 바람이 너무 많이 불어 실제로 위험했다. 군데군데 패여나간 돌계단을 올랐다. 한참을 뱅글뱅글 돌아 올라가 꼭대기에 이르렀더니 티그리스강과 사마라 시가지, 멀리 알리 하지 모스크의 금빛 지붕이 보였다.

 

사멜과 나는 미나레트의 꼭대기에 앉아 모래바람을 맞으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보니엠의 유명한 팝송 <바빌론의 강> 첫 구절을 불렀는데, 이라크 사람과 이야기를 하면서 웃을 수 있었던 것은 사멜과 대화를 할 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다. 

 

사멜은 80년대 이란-이라크전 때 이란에 포로로 잡혀갔었단다. 믿기 힘들다고 했더니, "당신이 믿건 안 믿건 내 말은 사실"이라고 했다. 사멜은 영어를 아주 잘 했고, 말단공무원으로 정보원 역할이나 하기에는 너무 지적인 사람이었다. 무슨 사연이 있길래 이렇게 살고 있을까.

 

나는 이틀전 방문했던 아가르구프의 지구라트(내가 태어나서 본 것 중 가장 오래된 건축물)와 바빌론, 사마라가 준 인상을 얘기하면서 "한국은 현대화가 너무 빨리 진행돼 전통문화유산이 상당부분 없어져버렸다"고 말했다. 사멜이 동감을 표시하길래 바빌론에서 보았던 사담의 대통령궁 얘기로 화제를 이었다. 

 

"나는 다만 대통령궁 앞을 자동차로 지나가보려던 것뿐이었는데, 그것조차 안 되느냐"고 했더니 사멜은 "우리는 가난하고 힘 없는 사람들 아니냐"며 웃었다. 외국인들 앞에서는 "I love Saddam"이라는 판에 박힌 말만을 내놓는 이라크인들 사이에서 예외적으로 자조 섞인 웃음을 보이는 그를 보니 어쩐지 즐거워졌다.

 

그날은 사담의 연임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 결과가 나온 날이었다. 

 

"한국에도 과거에 한 사람이 20년 가까이 집권했던 적이 있다. 우리는 그렇게 오래 집권하는 사람을 독재자라고 부른다."

 

타리크는 영어를 잘 못하기 때문에 나와 사멜은 비교적 <자유롭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지만, 사담을 가리켜 직접 <독재자>라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우회적인 질문을 못알아들을 리 없는 사멜은 웃으면서 대답을 피했다. 그는 내게 한국의 분단에 관한 질문을 던졌다. 한국전쟁에 관한 필름을 본 일 있는데, 어떠냐고 해서 나는 "미국은 이라크를 미워하는 것처럼 북한도 미워한다"고 말해줬다. 이번엔 그가 즐거워보였다.

 

사마라 시내의 알리 하지 모스크를 찾았다. 모스크에 들어가기전 사멜이 내게 "카디미야 모스크에 어떻게 들어갔느냐"고 물었다. 

 

"나는 무슬림이라고 했어요."

"You lied!" 

 

바그다드의 황금돔사원에서는 아바를 빌려쓰고 들어가니 괜찮았는데, 이 곳의 사원에서는 "진짜 무슬림이냐"고 확인을 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거짓말이라고 순순히 고백할 사람이 있겠는가. 다시 한번 아바를 빌려쓰고 사원 구경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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