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빌론에 갔었다. 바빌론, 바벨. 이라크 사람들은 외국인에게는 (영어로) 바빌론이라 말하고, 자기들끼리는 그냥 바벨이라고만 부른다.
택시를 빌려 타고 갔다. 기아에서 만든 프레스코인가 하는 승합차인데, 운전기사 타리크(32)와는 그 뒤로도 한 이틀인가를 함께 다녔다. 한국산 전자제품 상점들이 몰려 있는 카라데 거리를 지나 바그다드를 벗어나니 허름한 집들, 주변에는 대추야자밭이 보인다. 바그다드가 있는 바그다드주(州) 바로 남쪽에 바빌론이 있는 바벨주가 붙어 있다.
승합차는 바벨주의 시작인 마무디야 마을을 지나는데, 여기도 도처에 사담의 얼굴이다. '나암 나암(예스 예스)' 하는 선전구호가 쓰인 현수막들. 곳곳에 일본제, 한국제 자동차가 보이는데 모두 20-30년전 것들이다. 흰 페인트로 덧칠한 도요타의 작은 트럭들과 한국산 '봉고차'들. '낡았다'라는 말로는 어느 정도의 고물들인지 짐작이 가지 않을, 그런 오래된 차들이 잘도 다닌다. 바그다드 시내에서보다 아랍 전통의상을 입은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말에 리어카를 붙인 것 같은 마차가 지나다녀서 '지금 나는 어느 시대를 가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바빌론까지 가는 길에 펼쳐져 있는 대추야자밭. 이라크는 대추야자가 가장 많이 생산되는 나라다. 아랍인들은 대추야자를 아주 좋아하는데, "하루에 대추야자를 3알씩 먹으면 병이 없다"고 할 정도로 아끼고 즐긴다. 나중에 대사관에서 대추야자를 먹어볼 기회가 있었는데 양갱 같은 질감에 달고 맛있었다.
평원을 덮은 대추야자밭을 보면 이라크가 얼마나 비옥한 나라인지를 알 수 있다. 남부와 서부에 광대한 사막이 있기는 하지만, 이곳에는 강이 있다. "아랍에서 큰 강이 두 개나 있는 나라가 여기 말고 어디 있겠어요."
교민들의 귀띔이 아니더라도, 이 나라에는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라는 두 개의 큰 강이 있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스스로를 아람 나하라임(Aram Naharayim), '두 강의 아람'이라 불렀다는 얘기를 들은 적 있다. '아람'은 땅 혹은 세상을 이르는 것이니까, 이 말은 즉 메소포타미아(그리스어)를 가리키는 현지 이름이다.
북부의 산지는 이른바 쿠르디스탄이라 불리는 땅인데 이라크-터키-시리아 등 5개국에 걸쳐 살고 있는 쿠르드족들의 땅이다(쿠르드에 대해서는 언제고 얘기할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세상에서 가장 애처로운 민족 중의 하나다). 이 북부산지는 강우량이 제법 되어서 과일이 많이 나는 곳이라고 들었다. 그런가 하면 남부에는 한때 아랍권 최대의 항구(지금 그 영예는 두바이 등지로 넘어갔지만)였던 바스라가 있어 바다와 면해 있고, 중부의 너른 땅은 모두 탄탄한 평지다.
바빌론까지 가는 길은 탄탄대로였다. 사실 이라크에서 내가 본 길은 모두 왕복 4∼6차선의 쭉쭉 뻗은 길이었다. 1970년대 오일달러가 쏟아져 들어올 때 만든 도로 인프라는 대단히 훌륭해서, 나는 한국에서도 이라크의 길들과 같은 좋은 길들을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이라크 사람들이 '혼다이, 혼다이(현대)'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당시에 현대가 이라크 곳곳의 건설에 참여했지만 감리는 유럽 업체들이 맡았다는데, 그때 도로와 건물들을 얼마나 잘 만들었는지 20여년간 보수공사 한번 못했는데도 여전히 아랍에서는 최고 수준이라고 했다. 여름이면 60℃씩 기온이 올라가는데도 땜질 자국 하나 없는 것이 이라크의 도로다.
이 땅에서 세계 최고(最古)의 도시문명 중 하나인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태어났는데, 사실 이 지역에서 발견된 인간의 거주 흔적은 12만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유적이 석유밭으로 유명한 북부의 키르쿠크 지역 바르다-발카에 있다고 하는데 가보지는 못했다.
본격적인 '문명'이라고 할만한 것은 기원전 3000년 무렵에 나타난다. 문자로 남아 있는 최초의 왕국은 수메르다.Noah Kramer의 <문명의 요람(Cradle of Civilization)>에서 인용하자면 메소포타미아인들은 "도시에 살면서 별을 공부하고, 아치와 바퀴달린 탈 것을 만들고, 서사시를 쓰고, 법령을 만들고, 리넨과 돛단배를 생산하고, 점성술의 기초를 세우고, 과학과 수학과 의학 문학 철학 종교의 기본틀을 만들었던 최초의 사람들"이다.
★ 이라크 고대사
3000 BC 수메르·아카드 고대왕국들이 일어나다
1900 BC 바빌론이 고대왕국의 중심지로 부상
1400 BC 앗수리아(아시리아) 제국
606-539 BC 신바빌로니아의 융성
539-330 BC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왕국 건설
331-129 BC 셀레우스 왕조
130 BC-AD 226 파르티아 왕조
AD 227-636 사산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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