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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여인의 키스 El Beso de La Mujer Aran"a
마누엘 푸익 (지은이) | 송병선 (옮긴이) | 민음사 | 2000-06-12
그래, 난 처음부터 이 책이 재미있을 줄 알았다니까. 기대 만땅이었다. 책을 읽기 전, 책에 대해 아는 것은 거의 없었다. 작가 이름이 마누엘 푸익이라는 것, 남미 쪽 사람이라는 것, 영화로도 나왔다는 것. 그것 뿐이었다. 책의 리뷰들도 제목만 보고 일부러 읽지 않았다. 책의 줄거리를 전혀 몰랐으니, 그저 나의 궁금증은 '대체 거미여인은 누구이며 누구한테 키스를 하는가'라는 거였다.
책 속에 참 여러가지가 나온다. 여자, 남자, 좀비, 표범, 야만, 억압, 공포, 사랑, 슬픔, 동성애, 게릴라, 라틴아메리카. 잘도 조합해놨다. 거미여인이 누구인지, 누구에게 키스를 하는지, 왜 하는지, 거미여인과 거미남자(키스의 상대)는 어떤 관계인지-- 엽기적 로맨스를 연상하며 소설을 읽어가는 과정은 힘들고도 재미있었다. 힘들었던 것은 책 속의 액자에 박힌 그림들이 너무 섬세하고 날카롭고 나를 압도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고, 재밌었던 것은 그림(영화/노래/책/이야기) 하나하나가 생생하고 상징적이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이상하다. 책을 읽으면서 가슴이 두근두근, 다음 장의 내용이 기다려진다기보다는 좀 무서웠다. 내가 왜? 남미의 게릴라도 아니고 동성애자도 아니고 표범여인도 거미여인도 좀비도 아니고 좀비 부인도 아닌 내가 왜?
이 책은 어딘가, 관음증을 자극하는 구석이 있다. 두 사람, 어쩌면 '나의 이야기'일지도 모를 '남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머릿속으로 그려보고 상상을 음미하는 사람들. 몰래 들여다보는 듯한 은밀한 쾌감. 그리고 그들을 들여다보고 엿듣는 나.
그래서 두근거렸다. 어쩌면 내가 지금 관음증환자처럼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 남의 나라 남의 방 남의 머릿속이 아니라 인간 누구나가 갖고 있는 야릇한 사랑, 원초적인 공포 같은 것들이 아닌가 싶어서. 책에 등장하는 두 사람의 대화가 이뤄지는 공간은 밀실이다. 밀실 중에서도 또 밀실, 억압과 긴장이 최고조에 달해있는 공간. 그 곳에서 두 사람은 영화를 보고 꿈을 꾸고 책을 읽고 이야기를 하고 사랑을 나눈다.
그리하여 밀실은 공포와 긴장과 갈등과 억압의 공간에서 우정과 사랑이 충만한 공간으로 변모한다. 어울리지 않는 자들의 결합은 항상 신선하다. 헌데 이 작가는 어찌나 심술궂은지, 그 신선함에서 이야기를 끝내 상큼한 여운을 남겨주는 대신(해피엔딩을 좌시하지 못하는 작가들은 꼭 있다) 기어이 끝장을 보여주고야 만다. 밀실에 갇힌 두 사람이 나누는 은밀한 이야기는 기어이 제도/폭력/통제 따위에 포위된다. 관음의 쾌락이 넘실거리는 듯하던 밀실은 '사방이 트인' 횡단보도로 바뀐다.
그러나 과연 밀실은 어디이고 광장은 어디인가. 배신과 신뢰 사이, 적과 친구 사이를 어떻게 구분할까. 사랑은 어디에 있고 죽음은 어디에 있는가. 작가가 집어넣은 액자속의 이야기들에서 사랑과 죽음은 항상 한 존재의 두 얼굴이다. 그렇게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어놓고서 마누엘 푸익은 "이것은 짧지만 행복한 꿈"이라 말한다.
역시, 재미있어, 이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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