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간된 지 몇년 지난 책이다. 다소 '선정적인' 제목에, 에릭 홉스봄의 이름을 표지에 박아놨다. 책은 1999년 오스트리아에서 열린 어느 학술대회 발표문들을 모은 것인데, 홉스봄이 총론격인 글을 썼다.
홉스봄의 글을 많이는 안 읽어봤지만 논지가 명확하면서도 뭐랄까, 낙관적이랄까, 그런 점이 참 마음에 든다. 여기서 '낙관적'이라는 것의 의미는- 홉스봄이 지나온 '노동의 세기(20세기)'를 의미없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는, 노동운동 자체를 '실패한 프로젝트'로 평가절하해버리지 않는다는, 숱한 '좌파 출신 학자들'처럼 얄팍한 자아비판 내지 반성 따위는 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참 힘든 일이다. 자본의 승리가 너무나 굳건해보이는 이 세상에서 '노동운동은 영원히 계속될 것'이라고 말한다는 것은. 그래서 홉스봄은 '(현실)사회주의 기획'과 '노동운동'을 구분한다. 사회주의 프로젝트는 실패로 끝났는지 모르지만 인간의 노동이 존재하는 한 노동운동 또한 존재할 것이라는 얘기다.
한국 학자들의 글은 주로 동아시아를 들여다보면서, 이 지역의 사회주의가 '서구적 근대화'에 맞선 '민족주의적 근대화'의 이데올로기 도구가 됐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중국의 대약진운동이나 북한의 천리마운동 따위를 떠올리면 쉽게 동의할 수 있는 부분이다.
마지막 부분은 라틴아메리카/여성/인종차별과 노동운동(남아공) 등등을 다루는 짤막한 논문들로 구성돼 있다. 구성이 좀 산만하긴 한데... 결국 독자가 궁금한 것 &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은.
독자: 결론적으로 말해서 '사회주의'는 실패한 프로젝트다는 얘기인가요?
학자들(=책): 그렇죠. 노동운동 자체가 실패라는 얘기는 아닙니다만, 정치체제로서의 사회주의는 실패했습니다. 서유럽에서 사회주의/사민주의는 자본과 동거하는데에 만족했고요, 동유럽에서 사회주의를 좀 제대로 해보려는 시도가 있기는 했는데.. 그넘의 스탈린주의 땜에 다 망가졌지요. 아시아에선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로 변질돼서 외려 독재의 수단이 됐고...
그렇다면 남은 문제는? 홉스봄처럼 '노동운동은 끝난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면, 지금까지의 (스탈린주의적 혹은 제3세계적) 사회주의 '기획'(이 말 참 아리까리하다)과 다른, 노동운동의 새로운 희망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큰 이야기 대신 '작은 이야기'의 의미를 찾으려는 포스트모던한 움직임도 보인다. 책의 뒷부분, 라틴 아메리카의 노동운동 연구와 젠더 문제, 인종문제를 다룬 세 편의 논문은 '어디에서 희망을 찾을 것인가'라는 점에서 참 재미있었다.
다니엘 제임스라는 학자는 라틴아메리카 노동운동사라기보다는, 노동운동 '연구사'에 대해 짧고도 흥미있게 소개하고 있다. 인류학적 연구방법이 노동운동 연구와 결합되어 어떻게 노동운동의 새로운 방향에 대해 단초를 제공해주는지를 다룬 것이 인상적이었다. 과거 종속이론이 국제관계에서 라틴아메리카의 '주변부적 위치'를 진단한 것이었다면, 이 사람이 언급한 '민족지학적 연구'는 밖에서 안으로, 추상에서 구체로 시선을 바꾼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젠더 문제를 쓴 쉴라 로우보섬이라는 여성 학자는 주로 미국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젠더 렌즈'로 노동 문제를 들여다보는 것이 '여자들을 위한 것'에 국한되는 게 아니라, 노동/노동운동을 새롭고 더욱 역동적인 방식으로 볼 수 있게 해준다고 말한다. 맞는 얘기다. 뒤이어 남아공의 한 학자는 자기네 나라에서 인종문제가 어떻게 노동운동과 얼켜있었는지를 설명한다.
노동운동을 지역/젠더/인종과 결합시켜 생각해보는 것이 아직도 많이 부족하다. 초정보화시대 새로운 노동형태-새로운 노동운동을 고민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라도 '노동'이라는 테마를 들여다볼 수 있는 여러가지 렌즈를 가질 필요가 있다.
아주 새로운 것도 아닌, 지역/젠더/인종 렌즈조차 우리는 갖고 있지 못하다. 자본의 글로벌화 못잖게 노동력의 글로벌화도 이뤄져가고 있지 않은가. 우리에겐 노동운동은 있어도 인종문제 따위는 없다고 말할 수 있는가? 당장 동남아 출신 '불법노동자'들이 그렇게 학대를 당하고 있는데 말이다. 뭐 대단히, 대단히 참신한 정도는 아니지만, 여러가지 렌즈가 필요하다는 점을 알려준다는 점에선 재미있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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