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아시아의 어제와 오늘

"영국인들이 호주에 온 것은 침략(invasion)"

딸기21 2011. 6. 28. 18:10
728x90

“영국인들이 호주에 들어온 것은 침략(invasion)이다.”

호주 시드니 시의회가 27일 220여년 전 영국인들의 호주 정착을 ‘침략’으로 규정했습니다. 시의회는 시의 장기 플랜인 ‘2030 도시계획’을 만들면서, 이 문구를 넣는 방안을 놓고 표결을 해 7-2로 통과시켰습니다. 


호주 전체는 아니고 시드니 시의회 차원의 규정이지만, 과거 원주민들에게 저지른 범죄에 대한 반성과 규명 작업이 조금씩이나마 진전을 보고 있는 상황에서 선도적으로 이뤄진 것이라 큰 반향을 불러오고 있습니다. 영국계 정착민 후손들이 인구 대부분을 차지하는 호주에서 침략이라는 단어를 놓고 논란이 계속될 것 같습니다. 


'도시계획'은 “1788년 시드니 해안에 도착한 영국인 정착민들은 그 지역에 살고 있던 에오라(Eora) 부족 입장에서는 전통적으로 살아온 땅을 빼앗기는 점령으로 귀결됐다”고 적고 있습니다. 또한 영국인들의 침략은 “원주민들에게 파괴적인 충격(devastating impact)을 주었다”고 명시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원주민 문화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화 중의 하나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고 표현했습니다.


 이 문구가 들어가게 된 데에는 원주민들의 역할이 컸습니다. 원주민 단체들은 끔찍한 식민주의의 폐해를 분명히 밝히고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서라도 이런 규정이 필요하다는 입장이었고요. 이날 표결이 벌어진 의회 회의실에도 원주민 방청객들이 많이 왔었다고 합니다. 일부 시의원들은 ‘침략’이라는 논쟁적인 문구를 넣는 데에 반대하기도 했지만, 유럽인들이 도래하면서 원주민들이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는 역사적 사실 자체는 모두 인정했다고 시 측은 설명했습니다.



도시계획 선언하는데 왜 과거사 문제가 불거진 걸까요.
 

‘애버리지니·토레스해협 자문위원회’라는 게 있습니다. 애버리지니는 호주의 원주민들을 말하죠. 호주 정부가 과거 애버리지니들과, 토레스해협 섬에 살던 또다른 원주민 부족의 아이들을 부모에게서 떼어내는 등 말 못할 박해를 자행하고 공공연히 말살작전을 펼쳤습니다. 그래서 그 진상을 규명하고 피해를 보상하기 위한 자문위원회를 설치한 건데요. 

이 자문위원회의 시드니 시위원회 측이 도시계획 문건에 담길 시드니의 역사 부분에 ‘침략’이라는 용어를 명시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용어에 반대하는 쪽에서는 좀더 온건하게 들리는 ‘식민화(colonisation)’라는 단어로 대체하자고 주장했지만 표결 끝에 결국 침략으로 명시됐습니다.
전날까지도 클로버 무어 시장이 침략이라는 말을 피하자고 했는데, 원주민 단체들이나 자문위 측과 격론을 벌인 끝에 “그들이 겪었던 일은 침략이 맞다”는 점을 인정했다고 하네요.

(중학교 때 세계사에 대한 책을 보면서, 백인들이 호주 원주민들을 '사냥'하는 그림을 보고 경악했던 기억이 납니다. 제게 호주의 이미지는 그 그림이었습니다. 끔찍한 인종 학살. 그것이 '침략'이 아니라고 한다면... -_- )


Captain James Cook at Botany Bay in April 1770 _텔레그라프

 
 

자문위원회 공동위원장을 맡고 있는 마셀 호프 부시장도 “위원회 측 요구가 타당성이 있었다”며 받아들였습니다. 호프 부시장은 피해자 입장에서 역사를 바라볼 필요가 있음을 지적하기 위해 유대인들을 예로 들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경험한 것이 홀로코스트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가 단 1분이라도 그 단어를 그들에게서 떼어내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것과 마찬가지다. 애버리지니들과 토레스 해협 섬 원주민이 침략이라고 믿는다.”

가해자인 영국인들이 아닌 원주민들 입장에서 보면 침략은 분명 침략인 거고 그걸 인정한 것이죠. 일본을 비롯해 침략의 역사를 안고 있는 모든 집단들이 이런 생각을 좀 해주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앞으로도 원주민이 아닌 백인 주민들의 반발이 만만찮을 것 같습니다. 시드니모닝헤럴드가 이번 표결 과정을 상세히 보도했는데요. 표결에서 반대표를 던진 필립 블랙이라는 의원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호주는 원래 이민자들의 땅이다. 대략 5만년 전에 이 땅에 도래한 사람들부터, 1788년 영국에서 온 제1선단 사람들, 그리고 지금 분쟁지역을 떠나 이 나라로 오는 난민들까지 모두 이민자들이다. 외지인들이 올 때마다 논란이 벌어지지만 현대의 호주라는 나라를 형성하면서 공동의 여행에 모두 동참하고 있다.”


호주 등 대양주 일대 원주민들은 수만년 전 아프리카 동부 해안에서 건너온 사람들의 후예이니 그렇게 따지고 보면 외부에서 온 침략자 아닌 사람이 누가 있느냐는 것인데, 이건 지나친 비약이죠.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아프리카계 주민들을 탄압했던 네덜란드계 백인들, 즉 ‘보어’인들도 같은 주장을 했었습니다. 남아공 흑인들은 자기네들과 비슷한 시기에 북쪽에서 남쪽으로 내려온 외지인들이지 거기 원주민들이 아니라고요. 


블랙 의원의 이런 억지 주장에 대해 원주민 자문위원들이 사퇴하겠다고 압박하고 나서는 등 설전이 한 차례 벌어졌다고 하는데요. 설득력이 있든 없든, 앞으로도 호주에서 ‘침략’이라는 용어에 대한 반감은 계속 일어날 것 같습니다.


지금 호주에는 원주민들이 얼마나, 어떻게 살고 있을까요?

1788년 무렵 영국인들이 정착한 초기에는 거주지역 안에만 1500명 이상의 원주민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유럽에서 건너온 천연두 때문에 1년만에 절반으로 줄었고, 오래지 않아 거의 사라졌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당시 영국 정착민들은 원주민 시신을 가져오면 현상금을 주는 식으로 원주민 말살에 나서기도 했습니다. 한 세기 전만 해도 그나마 원주민 수가 100만명은 되었는데, 지금은 47만명으로 줄었습니다. 전체 인구 2200만명 중 소수민족으로 전락한 거죠.

Young Aborigines were 28 times more likely to be jailed than non-Aborigines, a found Tuesday, a "shameful state of affairs" that saw them accounting for 59 percent of the juvenile prison population. (AFP/File/Greg Wood)


숫자가 적을 뿐 아니라, 현실도 열악합니다. 며칠 전 호주 의회 보고서에 따르면 원주민들의 상황은 ‘국가적인 위기’ 수준입니다. 미국 내 흑인들의 처지를 연상케 하는데요.
지난 10년 새 교도소에 수감되는 원주민 비율은 66%가 뛰었습니다. 호주 전체 인구에서 원주민이 차지하는 비중은 2.3%에 불과한데 교도소에 수감된 성인 중 25%가 원주민입니다. 청소년으로 내려가면, 교화시설 수용자 중 원주민이 59%를 차지합니다. 특히 청소년들이 교육 기회나 복지 혜택도 제대로 누리지 못한 채 빈곤에 시달리다 범죄에 노출된다는 뜻입니다.

 

박해와 대량학살의 끔찍한 역사에 비해, 호주에서는 과거를 돌아보는 작업이 아주 늦게 시작됐습니다. 악명 높은 원주민 아이들에 대한 분리정책, 이른바 ‘도둑맞은 세대’ 문제에 대해 처음으로 정부가 조사에 들어간 것이 1995년입니다. 100년 가까이 지속된 이 아동 분리정책은 애버리지니와 토레스 해협 섬 주민의 아이들을 억지로 부모에게서 떼어내 백인 가정에 입양시키거나 아동보호시설에 보내는 조치였는데요. 전통문화를 말살하고 뿌리를 잃게 만드는 끔찍한 비인간화 작업이었죠. 

1995년 폴 키팅 총리가 이끄는 노동당 정부가 원주민 단체들의 요구로 이 문제에 대한 청문회를 열었고, 청문회를 계기로 조사가 시작돼 1997년 700쪽 분량의 보고서가 만들어졌습니다.

하지만 배상이나 사과는 늦었습니다. 어떤 주에서는 사과를 하거나 배상을 했고, 어떤 케이스에 대해서는 법원이 배상 판결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정부를 대표하는 총리가 공식 사과를 한 것은 케빈 러드 현 총리가 취임한 이후인 2008년입니다. 

그런데 이번 시드니 경우에서 보이듯 여전히 과거를 규정하는 용어를 놓고 논란이 벌어지고 있고요. 시드니 시의회는 영국 뿐 아니라 모든 유럽인의 도래를 침략으로 규정할지 말지에 대해서도 결정을 내릴 예정입니다. 시드니 외의 다른 자치단체들에서도 비슷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당분간 침략 논란은 가라앉지 않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