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네 책방

소크라테스와 헤르만 헤세의 점심

딸기21 2001. 5. 30. 15:52
소크라테스와 헤르만 헤세의 점심 Le Miroir des Idees
미셸 투르니에 (지은이) | 김정란 (옮긴이) | 북라인



번역자인 김정란교수는 이 책에 대해 ‘먹을 수 있는 철학책’이라면서 ‘철학지망생이었던 한 명의 작가가 써낸 매우 흥미로운 철학요리서’라는 설명을 붙였다.


벌써 지난 봄에, 이 책의 앞부분을 읽다가 그만 흐름을 놓치고 말았다. 옆의 선배 자리에 쓰레기처럼 쌓여 있던 더미에서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이 책을 찾아냈다. 알고보니 그 더미는 내 ‘쓰레기들’이었는데. 책상과 책상 사이의 좁은 틈을 기준으로 ‘내 세상’과 ‘타인의 영역’을 구분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규칙이 많고 꼼꼼한 사람들의 얘기인데도 난 내가 그런 사람인줄 착각하고 있었다.


고양이 이야기는 전에도 한번 한 일이 있었다. 다시한번 인용하자면


"장 콕토는 자기는 개보다는 고양이를 좋아하는데, 그 이유는 경찰 고양이를 본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양치기 고양이라든지 사냥 고양이, 장님 길잡이 고양이, 서커스 고양이, 썰매 끄는 고양이도 없다. 고양이는 명예를 걸고 그 무엇에도 도움이 되지 않기로 작정한 것처럼 보인다"


이 책에서 제일 맘에 드는 구절이다. ‘명예를 걸고’ ‘그 무엇에도 도움이 되지 않기로 작정’했다니! 존재 그 자체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 자만이 저런 ‘명예’를 운운할 수 있을 것 같다. 어설픈 의식 따위를 벗어던진 진정한 자유인의 모습이 바로 고양이에게 있다고 해야 할까.


(개는 주인에게 충성을 바치지만, 고양이는 자기가 살고 있는 집 자체를 사랑한다는,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렇다면 고양이야말로 안주하는 동물이라는 얘기인데...어느 쪽이 맞는지는 잘 모르겠다. 나는 투르니에의 이야기에 더 끌린다.)


이 책은 느슨하면서도 가볍게 읽을 수 있는데, 앞의 ‘개와 고양이’처럼 두개씩의 대립항으로 여러 얘기를 풀어간다. ‘대립’은 단순하고 재미있지만 야박하고 극단적이고 풍요롭지가 못하다. 어쨌든 투르니에가 골라놓은 대립쌍들 중에는 재미있는 것들도 있다. 눈에 띄는 대립쌍 하나.


<지하실과 다락방> 


잘 지은 집들은 모두 지하실과 다락방을 하나씩 가지고 있다. 집의 맨 끝에 있는 이 장소들은 둘 다 모두 어둡지만, 어둠의 성격은 매우 다르다. 나선형 계단으로부터 지하실로 떨어지는 어렴풋한 빛은 대지와 땅-정원이나 거리-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햇빛이 그 빛에 끼여드는 일은 거의 없다. 그것은 불순하고, 약해지고, 기가 한풀 꺾인 박명(薄明)이다. 반면에 막바로 지붕에 달려 있는 다락방의 자그마한 여닫이창은 하늘과 창공, 하늘에 떠 있는 구름, 달, 별을 향해 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하실은 삶의 장소이며, 다락방은 죽음의 장소이다. 다락방은, 보들레르가 말한 바 있는 하늘의 발코니를 언제나 닮아 있다. 그 곳에서는 지나가 버린 세월이 유행 지난 옷을 입고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다. 다락방의 공기는 먼지와 시든 꽃의 냄새를 풍긴다. 다락방에는 유모차, 팔다리가 부서진 인형, 낡아빠진 밀짚모자, 책장이 노리끼리해진 그림책, 너무나 까마득한 옛날 뉴스를 전해주는 신문들이 있다. 다락방은 기온차가 심하다. 여름에는 푹푹 찌고, 겨울에는 얼음처럼 차다. 다락방에서 잠자고 있는 상자나 트렁크는 너무 뒤지지 않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부끄럽거나 고통스러운 가족의 비밀을 들춰낼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다락방으로 올라가는 나무 계단이 말라 있고 가볍게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는데 반해서, 차갑고 축축한 돌로 되어있는 지하실로 내려가는 계단에서는 이끼와 지저분한 흙냄새가 난다. 지하실의 온도는 사계절 내내 똑같다. 그렇지만 겨울에는 따뜻하게 느껴지고, 여름에는 시원하게 느껴진다. 과거를 향해 몸을 돌리고 있기 때문에, 다락방은 기억하고 보존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반면에 지하실에서는 앞으로 다가올 계절이 익어가고 있다. 마늘은 천장에 매달려 있고, 쇠로 된 선반 위에서는 포도주가 익어가고 있다. 한쪽 구석에서는 겨울에 사용할 조개탄이 은은한 빛을 발하고 있다. 반대편 구석에는 못생긴 감자들이 쌓여 있다...전쟁을 치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전쟁 때 지하실이 폭격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다는 사실을 잊지 못한다. 그래서 프랑스가 나치 점령으로부터 해방됐을 때 스무살 먹은 젊은이들은 생제르망 데 프레에 있는 지하실들에서 춤을 추었던 것이다. 그렇다, 어떤 지하실에든 숨겨진 행복의 약속이 있는 것이다. 한 집의 살아있는 뿌리가 지하실 안에 박혀 있다. 다락방에서는 추억과 시가 떠다닌다. 지하실의 상징적 동물은 쥐이다. 그런가 하면, 다락방의 동물은 지혜의 여신 미네르바의 새 올빼미이다.


어차피 아파트에 살고 있는 처지에, 프랑스의 지하실과 다락방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마는...집 뿐만 아니라 사람에게는 누구나 지하실과 다락방이 있을테니까. 숨겨진 행복의 약속이 있는 자리와, 추억과 시가 떠다니는 자리. 추억과 시의 자리에 ‘미네르바의 올빼미’를 붙여둔 것이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


당신은 목욕을 좋아하는가, 샤워를 좋아하는가.


‘남자인가 여자인가’ 중에서는 어느 한쪽을 쉽게 골라낼 수 있겠지만(하긴, 요샌 트랜스젠더들도 있군) 목욕 쪽인지 샤워 쪽인지, 유목민인지 정착민인지, 일차적인간인지 이차적 인간인지, 우파적 인간인지 좌파적 인간인지, 관념론자인지 리얼리스트인지를 구분하는 것은 쉽지 않다. 


내가 나를 모르는데, 넌들 나를 알겠느냐...나를 구분하는 것은 아주 어렵지만 재미있다. 나는 낙관론자, 좌파적 인간, ‘인류 전체에게 말을 거는 넓은 정신의 소유자’를 꾸준히 동경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