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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서정주, 머리에 석남꽃을 꽂고 네가 죽으면

딸기21 2001. 4. 1.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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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남꽃

서정주

머리에 석남꽃을 꽂고
네가 죽으면
머리에 석남꽃을 꽂고
나도 죽어서

나 죽는 바람에
네가 놀래 깨어나면
너 깨는 서슬에
나도 깨어나서

한 서른 해만 더 살아 볼꺼나
죽어서도 살아서
머리에 석남꽃을 꽂고
서른 해만 더 한번 살아 볼꺼나



머리 속에 오래동안, 그것도 꽤 자주, 맴돌던 시가 바로 저 <석남꽃>이었다.
고3 때였던 것 같다. 우리 학교의 책상은 흰 종이로 씌워서 비닐을 덮게 돼 있었는데, 시험 기간에는 한 반의 절반씩이 반을 바꿔 다른 교실로 간다. 어느 시험에서였는지 내가 옮겨가 앉은 책상에 저 시가 씌여 있었다. 문학소녀였던 그 자리의 주인이 베껴놓았던 것 같은데, <머리에 석남꽃을 꽂고 네가 죽으면> 하는 구절을 맘 속에 넣어두고 있었지만 누구의 시인지는 알지 못했다.


어린 시절인데, 왜 저 시가 그렇게 가슴에 남았을까. 꼭 찾아봐야지 하면서도 두번째 연까지만 외워놓고 있다가 불현듯 생각이 났다. 실은 며칠전 누구와 얘기를 하다가 미당의 시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미당이 죽은 뒤에 혹자는 "미당은 (친권력적 행각 뿐 아니라) 시도 잘 쓰지 못한다"며 문학성을 절하해버리는 것을 봤는데, 그 자의 논리력 여하와 상관없이 나는 미당의 시를 아주 좋아한다.
사람과 글이 어떻게 따로 가느냐고 하면 할말이 없지만, 그건 내게는 말 그대로 '논리'와 연관성 없는 '느낌'의 문제일 뿐이다.

안녕히 계세요 도련님, 하는 <춘향유문>(고교 시절 한 국어선생님은 여자 흉내 내가며 이 시를 아주 우습게 읽곤 했는데, 그 선생님은 김광균의 <설야>도 키득거리며 야시시하게 읽었다), 그리고 <추천사>(언젠가 영랑의 <춘향>이라는 시 얘기를 했었는데 그러고 보면 나는 춘향을 꽤 좋아하는 모양이다).
해와 하늘빛이 문둥이는 서러워-로 시작되는 <문둥이>의 첫 구절, 동지섣달 매서운 새도 비끼어간다던 <동천>, 아주 여러번 베껴써보았던, 가끔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던 <푸르른 날>. 신경림의 시들을 좋아하게 되기 전까지, 서정주는 내게는 <문인>을 대표하는 이름이었다.

어제 문득 생각나 인터넷을 뒤져보니 <석남꽃>이 미당의 시였다. 놀라면서, 또 반가와하면서 저 시에 딸린 미당의 수필을 읽었다.

"내 글 써 논 공책을 뒤적거려 보니 <머리에 석남꽃을 꽂고>라 제목한 이 시는 1969년 7월 15일 새벽 한 시에 쓴 것으로 되어 있으니, 이건 내가 지금 살고 있는 관악산 밑으로 이사오기 바로 한 해 전 일인데, 그때의 공덕동 집에도 나무와 풀섶이 꽤나 짙어 모기가 많아서 그 때문에 짧은 여름밤을, 열어 논 창 사이로 날아드는 모기떼와 싸움깨나 하고 앉았다가 쓴 것인 듯하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것은 내 육체의 꼴이지, 마음만은 그래도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한밤중쯤은 할 수 없이 그 영생이라는 걸 또 생각해야 견딜 마련이어서 물론 이런 걸 끄적거리고 버티고 있었을 것이다.
영생이란 말이 났으니 말이지만 마치 가을 으시시한 때에 홑옷만 겨우 한 벌 입은 푼수도 채 안 되는 내 영생의 자각과 감각 그것에 그래도 그 속팬츠 하나 몫은 넉근히 되게 나를 입힌 건 저 <대동운옥>이란 책 속의 것으로 전해져 오는 신라 때의 저 석남꽃이라는 꽃 얘기다."



뒷부분에 <아돌프 히틀러의 비단 팬츠>하는 구절이 나오는데 미당의 쭈글쭈글한 얼굴(지탄을 많이 받았던 그 얼굴)이 떠올라서 조금 웃었다. 수필 속에 나오는 <대동운옥>의 석남꽃 이야기라는 것은 옛날 설화인데 내가 좋아하는 종류의 얘기다. 

"신라 사람 최항(崔伉)의 자(字)는 석남(石枏)인데,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다. 부모가 그들 사이를 막아서 만날 수 없었다. 몇 개월 뒤에 최항이 갑자기 죽게 되었다.
여드레가 지나서 밤중에 최항이 밤중에 여인의 집에 찾아가니, 여인은 그가 죽은 줄 알지 못하고, 도리어 반갑게 맞아 들였다. 최항은 머리에 석남 꽃가지를 꽂고 있었는데, 여인에게 나누어주며 말하기를,
-부모님께서 당신과 더불어 같이 살기를 허락하셨소. 그 때문에 온 것이오.
마침내 여인과 더불어 그의 집에 돌아와 최항이 담을 넘어서 들어갔다. 밤이 장차 밝아오려 하는데, 오래도록 소식이 없었다. 그 집사람이 나와서 그녀를 보고 온 연유를 물으니, 여인이 모두 설명하였다. 그 집사람이 말하기를
-최항은 죽은지 여드레가 되어서 오늘 장례를 지내려 하거늘 무슨 괴이한 일을 말하시오?
여인이 말하기를,
-서방님께서는 저와 더불어 석남 꽃가지를 나누어 꽂으셨으니 이것으로서 징험(徵驗)을 삼을 수 있을 것이옵니다.
이에 관을 열어 보니, 시신의 머리에 석남 꽃가지가 꽂혀 있고, 옷은 이슬에 젖어 있었으며, 신발은 이미 헤어져 있었다. 여인이 그가 죽은 것을 알고 통곡(痛哭)하며 기절하려 하거늘, 최항이 이에 도로 살아났다. 그들은 삼십 년을 함께 살다가 죽었다. 
(新羅崔伉字石枏, 有愛妾. 父母禁之不得見. 數月伉暴死. 經八日, 夜中伉往妾家, 妾不知其死也, 顚喜迎接. 伉首揷石枏枝, 分與妾曰 "父母許與汝同居, 故來耳" 遂與妾 還到其家 伉踰垣而入. 夜將曉, 久無消息. 家人出見之, 門來由, 妾具說. 家人曰 "伉死八日, 今日欲葬, 何說怪事" 妾曰 "良人與我 分揷石枏枝, 可以此爲驗" 於是, 開棺視之, 屍首揷石枏, 露濕衣裳, 履已穿矣. 妾知其死. 痛哭欲絶, 伉乃還蘇. 偕老三十年而終)"




윌리엄 워터하우스의 오필리어.



생각난 김에, 미당의 시 하나.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섭섭하게 
그러나 
아주 섭섭치는 말고 
좀 섭섭한 듯만 하게, 

이별이게 
그러나 영 이별은 말고 
어디 내생에서라도 
다시 만나기로 하는 이별이게,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 아니라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엊그제 
만나고 가는 바람 아니라 
한두 철 전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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