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네 책방

'제3의 길'과 '좌파'의 토론

딸기21 2000. 12. 18.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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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앤서니 기든스와 윌 허튼의 대담을 읽었습니다. 제목은 '세계화 시대의 자본주의는 어디로 갈 것인가'하는 거였는데요, 번역이 좋지 않아 읽는 재미가 떨어졌지만 '망원경으로 조망하는 효과'는 충분했던 것 같습니다. 내용을 소개하면서, 저의 궁금증도 같이 얘기하고 싶네요.

윌 허튼, 앤서니 기든스 


재미있는 것은 두 사람의 태도, 즉 시각인데요, 앤서니 기든스는 다들 아시죠. 토니 블레어 노동당 정권의 브레인으로 꼽히는 사람이고, '제3의 길'이라는 노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윌 허튼은 사상적 스펙트럼에서 위치를 찾자면, 기든스보다 약간 왼쪽에 있는 사람인 듯 합니다. '옵서버'와 '가디언'지 편집장을 지냈습니다. 

대담에서 드러나는 두 사람의 차이는 결국 '자본주의는 그 자체 좋은 것(혹은 나쁜 것)인가'하는 문제와, '노동자 계급은 사라졌는가' 하는 문제로 귀결되는 것 같습니다. 세계화시대라는 변화의 물결을 보면서 과거와의 단절 쪽에 무게를 싣고 있는 기든스에 비해, 확실히 허튼은 연속성 쪽을 눈여겨보고 있습니다.

두 사람 다 세계화라는 거대한 변화의 물결이 존재한다는 것에는 이의가 없습니다. 아마 여기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사람은 (우리나라에도) 아무도 없겠지만요.

그럼 새로운 것은 뭐고, 변하지 않는 것은 또 뭔가. 두 사람 사이에 쟁점으로 떠오른 것은 노동자 계급의 문제와 빈곤의 문제인데, 먼저 노동자 계급의 존재 여부에 대한 두 사람의 시각을 들여다보죠.

'노조라는 틀로 조직화돼 있고, 긴밀한 유대로 서로 연결돼 있으며 대규모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노동자계급이라고 한다면, 21세기가 시작된 지금 노동자 계급은 사라진(적어도 '사라져 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해석은 아주 다릅니다. 기든스는 "노동자 계급을 폭넓은 공동체로 융합하려던 좌파의 기획은 물 건너갔다"고 단언합니다.

(재미난 것은, 요즘 유행하는 '기획'이라는 말입니다. 요샌 사회주의 구상을 '좌파의 기획'이라고 부르더군요. 예전엔 '이데올로기'이고 '사상'이었는데, 그런 말들과 '기획'이라는 말은 어감에서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제 눈에는 지식인들의 기회주의적 속성이 드러난 어휘 변화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반면 허튼은, '노동자 계급의 붕괴'와 '자신을 노동자 계급이라고 인식하는 집합적 개인들을 가리키는 개념의 붕괴'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합니다. 여러분의 시각은 어떠십니까? '노동자계급'이라는 개념이 무너졌을 뿐이라는 허튼의 시각에 동의하십니까?

이건 제가 지난해에 노동부에 출입할 때부터 궁금해하던 문제였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97-98년 경제위기 이후의 한국사회에서는 블루칼라(전형적인 '노동자 계급') 뿐 아니라, '넥타이 부대'로 불리는 화이트칼라 샐러리맨들조차 없어졌습니다.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사라지지 않기 위해 저항의 몸부림을 치고 있는(그러면서 수구세력 내지는 부도덕한 집단으로 몰리고 있는) 정부 투자기관 직원들과 재벌기업 노조, 공무원, 벤처기업 노동자들인 것 같습니다.

다음, 빈곤의 문제. 


기든스는 "세계화 이후 '빈곤'은 일률적(아마도 구조적, 집단적, 사회적이라는 의미인 것 같네요)이지 않으며, 개인적인 것이 됐다"고 진단합니다. 허튼은 이에 대해 "아직도 상당수의 사람들에게 빈곤은 여전히 절망적인 조건"이라며 반박하지요. "거대한 변화가 영원한 진실들과 나란히 자리를 잡고 있다는 것이 우리 시대의 불가사의다" 멋진 표현 아닙니까?
세계화니 정보시대니 국제금융네트워크니 하는 거대한 변화들이 글로벌한 규모로 밀려들고 있는데, 그/럼/에/도/불/구/하/고 부의 불평등, 빈곤층의 존재 같은 '영원한 진실'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
세계는 넓고, 풀어야 할 숙제는 정말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기로에 선 자본주의
앤서니 기든스 | 윌 허튼 (지은이) | 박찬욱 외 (옮긴이) | 생각의나무 | 2000-11-22



난 아직 아이가 없지만 내 주변에 아이를 키우고 있는 엄마들은 여럿 있다. (아마 이 글을 읽을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해당될 걸.) 그런데 그네들이 정말 '아이를 키우고' 있는 거냐고 되묻는다면, '예스' or '노' 대신에 여러가지 답변이 가능할 것이다.

내 주변의 여자들은 직장에 다니고 있고, 집에서 아이를 직접 '키우고' 있는 것은 다른 여자들이다. 아이를 키우는 여자들의 종류는 할머니, 외할머니, 가정부 등 다양하다.
가정부의 종류도 여러가지가 있다. 나이 지긋한 '할머니' 급의 가정부가 있는가하면 조선족 여자도 있다. 가정부 중에는 자기 아이를 다른 여자에게 맡기고 남의 아이를 보러 온 사람도 있을테고, 자기 손녀를 보는 대신에 돈을 볼러 나온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 역시, 만일 아이를 낫는다면 위에 열거한 케이스 중의 어느 하나가 될 것이 뻔하다. 적어도 내가 '남자같은 생활'을 포기하지 않는다면은. 그렇다면 내 아이를 키우는 어떤 '아이엄마'는 자신의 아이에게 갔어야 마땅할 애정의 일부를 내 아이에게 '전이'시키면서 어떤 감정의 기복을 겪을까. 또 나는 이렇게 체계화되고 조직적이면서 동시에 '사적인' 것으로 치부되는 '보살핌의 사슬' 속에서 어떤 변화를 얻을 것이며, 내 계산기에는 어떤 손익표가 나올까.

나는 조선족 가정부에게 내 아이를 맡길 수는 있지만 필리핀인 가정부에게 맡기는 것은 주저할 것이고, 필요에 따라 미국 사람을 상대로 이메일을 통한 취재를 할 수는 있지만 먼 나라의 기자들보다는 내 주변 친구들에게서 가장 큰 '친화력'을 느낀다. <기로에 선 자본주의>는 나같은 사람들, 나처럼 '기로에 선' 사람들에 대해 성찰해보려 하는 책이다. 앤서니 기든스와 윌 허튼 편저. 

필자들의 면면이 화려하다. 두 사람의 편저자를 비롯해 미 연방준비은행 총재를 지낸 폴 볼커, 울리히 벡, 로버트 커트너, 조지 소로스까지. 훑어보는 주제도 다양하다. 정보화 사회, 국제 금융시스템과 IMF의 기능, 소득 불평등 문제, 환경 제국주의, 글로벌 시대에서 '개인주의'의 문제, 미디어 제국주의, 그리고 '보살핌의 사슬'까지 종횡무진 오간다. 그러나 이 모든 문제를 포괄하는 핵심은 결국 '세계화'라는 것, 그리고 그 세계화의 동력인 '국제금융자본주의'라는 것으로 요약된다.

책 자체에 대해 평을 하자면, '평이하다'. 큰 담론들이 짤막한 글들에 담겨 있어 깊지 않으며, 자칫 하나마나한 소리로 치부될 거대 규모의 해법들로 가득차 있다. 난 당장 옆구리가 쑤신데, 어깨가 결린데, '의료체계의 개혁'이라고 쓴 처방전을 준다면 화가 나지 않을리 없다. 더우기 번역도 거지같다. 

그렇지만 '별 1개'로 점수를 매기기에는 좀 아깝다. 여러가지 화두를 던져주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보살핌의 사슬'이라는 것도 그렇고, 환경 제국주의에 대한 것도 그렇다. 남쪽 나라들이 북쪽 나라들의 쓰레기를 떠맡아 지구적 차원에서 환경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다는 정도는 다 아는 얘기겠지만 눈꺼풀을 한번 뒤집고 읽으면 신문에서는 볼 수 없었던 재미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기로에 선 나에게 '니 얼굴을 똑바로 봐라'라는 자극을 던져준다는 점에서는 별 4개를 줄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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