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의 풍차 Le moulin de Pologne
장 지오노 (지은이) | 박인철 (옮긴이) | 민음사 | 2000-10-01
고대 희랍 사람들이 비극을 좋아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줄곧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의 비극을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 책을 쓰는 동안 장 지오노가 그리스의 비극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비극은 항상 운명과 함께 간다는데.
운명, 별로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데 어쩐지 낯설게 느껴지는 말이다. 더우기 나처럼 말초적인 드라마들에 몰두해 있는 독자한테는 다소 어렵기도 한 단어다. 운명은 선대의 실수나 악의, 또는 신의 저주 따위를 후대의 사람들이 극복해낼 수 없기에 생기는 일들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해석하고 싶다.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업보'이고, 인간의 힘으로는 되지 않는 그런 일들을 말하는 것 아닐까.
프랑스의 어느 소도시에 '폴란드의 풍차'라는 영지가 있다. 이 소설은 변호사라는 직업을 가진 화자가 지켜본 한 집안에 대한 이야기이다. '신이 우리를 망각해버리기를!'이라는 신조를 가지고 있던 한 부유한 지주는 신의 장난으로 인한 불행을 피하겠다는 신념으로 두 딸을 어느 평범한 집안의 형제에게 시집보낸다. 결과는? 비극이다. 가족들은 4대에 걸쳐 사고로 죽거나 실종되거나 정신이 이상해져버린다.
그러나 더욱 비극적인 것은 비극을 바라보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다. 사람들은 항상 타인의 비극 그 자체를 미워하면서 마치 전염병이나 되는 것처럼 비극의 주인공을 왕따시키는 동시에 또 비극을 즐긴다. 그래서 비극은 더욱 증폭되고 운명은 더욱 가혹해지지만 세상은 여전히 돌아간다.
이어져 내려오는 저주의 역사, 그런 불행한 역사를 가진 가족에 관한 이야기같은 건 사실 현대인들의 머리 속에서는 이미 지워져버린 일종의 추억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는 이 짧은 소설을 통해 뇌세포 어딘가에 숨어있었던 그 추억을 건드린다. 잊은줄 알았던 기억을 그집어낸 작가는 무심한 세상 사람들에게 훈계라도 하듯이, "운명은 자신에게 저항하는 사람들에게 가혹한 힘을 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운명에 몸을 던지기 위해 유혹하는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것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가 보여주는 비극은 오이디푸스의 전형을 따르고 있으면서, 어느 고전 못지 않게 아름답다. 이 소설은 자연주의 작가로 알려진 지오노의 다른 작품들과는 여러 면에서 다르다. 나는 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을 읽고 감동을 받았고, '지오니즘'으로까지 불리는 자연주의와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을 좋아했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말년의 작품에 해당하는 이 소설에서 지오노는 비극의 모티브와 함께 마키아벨리즘, 즉 권력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보인다. '풍차'라는 제목에 걸맞는 조용하고 따뜻한 이야기를 기대했기 때문인지 생소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극마저 아름답게 여겨지게 만드는 것은 이 소설가의 능력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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