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네 책방

언젠가 바다 깊은 곳으로

딸기21 2000. 11. 7.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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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바다 깊은 곳으로 1, 2
마루야마 겐지 (지은이) | 박은주 (옮긴이) | 책세상 | 2000-07-10




제목은 멋진데 난 사실 바다가 무섭다. 우스운 소리 같지만 물이 너무 많아서다. 대학교 1학년 때 동아리 사람들이랑 부산 태종대에 갔었다. 거기서 절벽 밑의 바다를 봤는데, 낮인데다 햇빛이 좋은 날이라서 그랬는지 물이 하늘색이었다. 내가 "물 정말 많다"고 했더니 사람들이 당연한 소리를 한다고 비웃었다. 그런데 돌아보니 바위에 누군가가 "물 정말 많다"고 새겨놓은 게 보였다. 그래서 다들 배를 잡고 웃었다.

바다는 물 덩어리인데, 난 그게 너무 큰 덩어리라서 무섭다. 특히 밤에는. 난 아마도 바닷가에서는 살지 못할 것이다. 밤만 되면 검고 커다란, 상상도 못하게 커다란 물덩어리가 있는데 무서워서 그 옆에는 못 살 것이다.

마루야마 겐지의 작품은 처음 읽는데, '언젠가 바다 깊은 곳으로'라는 제목만 듣고도 으스스한 기분이 들었다. 이 작가는 아무래도 정신나간듯한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다. 소설을 다 읽고난 지금, 내 추측은 확신으로 변했다. 글이 참 좋고, 어두우면서도 매혹적이다. 그런데 그 어두움의 정도가 너무 심하다. 분홍빛 토끼조차도 어둡게 느껴지게 만들다니, 이 작가는 주저리주저리 말을 늘어놓으면서 독자들을 협박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아마노 세이지. 그의 집안은 비극적인 집안이다. 얼마 전에 '폴란드의 풍차'에서 비극에 대한 얘기를 했었는데, 마루야마의 이 작품이 고대의 비극과 다른 점이 있다면 주인공이 비극적 운명에 끝까지 순응하지 않는다는 거다. 타락한 아버지, 뒤룩뒤룩 살쪄서 지방에 눌려 죽은 엄마, 은행강도로 복역 중인 형, 더우기 애인은 어느 나쁜 놈의 총에 죽었다. 이 집안이 비극의 주인공이 된 건 북해도의 끝쪽 바닷가에 살아서도 아니고, 품성이 악해서도 아니고, 돈이 없어서도 아니다. 믿었던 장남이 대학입시에 실패해서 집안이 망했다니, 작가가 짖궂다고밖에 볼 수 없다.

이 정도면 충분히 비극인데 세이지에게는 여전히 기운이 남아 있다. 작가는 그 기운에 청춘이라는 이름을 붙여놨다. 그 덕분에, 밤에 보는 시커먼 물덩어리만큼이나 무서울 수 있었던 이야기는 한 젊은이의 주체할 수 없었던 청춘의 일기로 변모한다. 아주 무겁고 우울한데도 버텨나갈 수 있는 것은 젊은이의 기운 때문이라고 한다면 이 소설은 성장소설이고, 힘센 해파리와의 교감만 놓고 보면 매력있는 환타지 소설이다. 내 눈으로 보자면 무서운 물덩어리같은, 그렇지만 낮에는 하늘색으로 바뀌는 그런 소설이다.

지금은 밤이고, 소설이 마지막장을 막 덮고 난 지금의 나는 좀 우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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