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네 책방

황미나의 '레드문'을 둘러싼 의혹(?)

딸기21 2000. 9. 18.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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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제가 홈페이지에서 전지면씨와 '레드문'과 '총몽'에 대한 얘기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황미나의 '레드문'을 주말 동안 다시 읽었습니다.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만화대여점에 가서 10권까지 빌려다가 토요일날 다 읽었고, 일요일에는 그새를 참지 못하고 또다른 대여점에 가서 나머지 18권까지를 빌려다가 그 자리에서 다 읽었습니다.



'SF 액션 판타지'라고 책표지에 소개돼 있더군요. 말 그대로 SF와 액션, 그리고 판타지가 모두 들어있는 작품입니다. 평범한 고교생이던 '태영'이라는 남자애가 있습니다. 알고보니 태영이는 6살때 사고로 죽었고, 이 아이는 시그너스라는 별에서 온 필라르 왕자였습니다. 태영의 머리에 필라르의 뇌를 이식, 태영의 몸을 빌려 지구에 숨어살고 있었던 거죠.

태영과 필라르라는 전혀 다른 두 인물 사이에서 정체성을 고민하는 과정이 상세히 나옵니다. 연인간의 사랑은 이 작품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기는 합니다만, 여느 순정만화와 달리 절대적인 몫은 아닙니다. 모성애, 친구간의 우정, 애증 따위의 여러 종류 사랑이 골고루 배치돼 있습니다. 필라르가 악의 무리를 물리치고 시그너스를 '민중의 나라'로 만든다는 것이 전체를 꿰는 줄거리입니다.

남녀의 사랑을 가운데에 배치하지 않았다는 것 외에도 보통 순정만화와 다른 점이 아주 많습니다. 별나라 시그너스 왕궁이 한옥처럼 생겼고 왕족의 옷차림도 삼국시대 우리 옷을 본떴습니다. 일단 '우리 것'을 살리려는 작가의 노력이 가상하지요.

김혜린에게서 보아왔던 것과 비슷한 '약간 어설픈 민중사관'도 눈에 띕니다. 히어로의 초인적 능력에 많이 의지하고 있긴 하지만, 어쨌든 명확한 주제를 갖고 있는 셈입니다.

또 한 가지, 잔인한 장면이 많이 나온다는 겁니다. 사람의 팔을 잘라내고 작살이 사람의 가슴을 꿰뚫는 피바다가 곳곳에 펼쳐집니다. 동성애적인 감정을 묘사하는 것도 황미나 작품에서 늘 찾아볼 수 있는 거구요

이 만화는 '해피엔딩'입니다. 그런데 황미나가 뛰어난 점이 있다면, 아마도 '예상치 않은 결말'을 어색하지 않게 내놓는다는 점일 것입니다. 영웅사관에 익숙해 있는 독자들이 모두 '필라르가 구원의 태양, 곧 왕이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게 만들어놓고는 정작 결말에 가서는 필라르를 그림자 속으로 밀어넣어버립니다. 영웅은 맞는데, '왕'이 되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소년으로 돌아가버리니까요. 그리고 그 '영웅되기'의 방식도, 모든 초인적인 능력을 잃어버리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일반적인 '영웅'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입니다.

저는 사실 일본 애니메이션 '총몽'을 의식하면서 '레드문'을 읽었습니다. 레드문이 너무너무 재미있는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표절'의 의혹을 제껴버릴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천공(天空-이 자체가 일본말이죠)의 성 라퓨타'에 나오는 '라퓨타'는 공중에 떠 있는 성입니다. 라퓨타는 여러가지 알레고리들의 집합체이지만, 기본적으로 '유토피아'를 상징합니다. 라퓨타라는 모티브는 걸리버여행기에서 따온 것이라고 하더군요.

반대로 '총몽'은, 천공의 성을 철저하게 '디스토피아'적인 눈으로 바라봅니다. 공중도시 '쟈렘'에는 선택받은 부유층이 살고, 지상에는 쟈렘에서 떨궈진 허접쓰레기들을 받아먹고 사는 비참한 '민중'들이 삽니다. (메트로폴리스를 생각하시면 됩니다) '총몽'은 판타스틱하면서도 리얼합니다. 음울하고 엽기적인 화면이 '판타지'에 해당된다면, 계급갈등과 빈부격차 따위는 현실을 극단적으로 묘사해놓은 거죠.

'레드문'에 나오는 천공도시들은 총몽의 도시를 그대로 빌려온 것처럼 똑같습니다. 황미나가 '총몽'을 봤는지 안 봤는지는 모르지만, 너무 똑같은 설정이라서 의혹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레드문'에서는 디스토피아의 이미지가 '말로만' 나타날 뿐, 제대로 그려지지 않습니다. 총몽의 엽기적인 화면과 액션, '계급갈등'이라는 진지한 주제를 갖다붙여놓기는 했지만 리얼리티가 없습니다. 인간의 갈등을 설명하는 요소를 '사랑'으로 국한했기 때문입니다. 여러 종류의 사랑이 등장하긴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관념론을 벗어나지 못한다고나 할까요.

바로 그렇기 때문에, 황미나가 그리는 민중혁명 역시 설득력있게 다가오지 않고 '어설픈 민중사관'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거겠죠. 그나마 우리나라 만화가들 가운데 현실에 대한 천착에 있어서 손꼽히는 황미나인데,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순정만화에 무슨 '현실'을 요구하냐구요? 황미나니까 요구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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