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천무
김혜린. 대원씨아이
2000/08/22
지금 한창 영화로 상영되고 있죠. 과연 영화를 봐야 할까, 말아야 할까. 만화를 본 사람들은 영화를 보고 다들 실망했다던데...김희선이 비천무의 주인공 '설리' 역할을 맡았다는데, 얼굴만 갖고 과연 될까요.
순정만화 팬 중에 김혜린 모르는 사람은 없겠죠. 한국만화의 금자탑이자 불후의 명작이고 길이 남을 고전인 '북해의 별'의 작가 아닙니까.
솔직히 말하면 비천무는 북해의 별에 비해 좀 떨어집니다. 그렇지만 비천무가 그려지기 시작한 시점이 86년도라는 점을 감안해야겠죠. 일본것 갖다 베끼기, 캔디와 신데렐라의 짬뽕으로 일관하고 있던 이른바 '순정만화'라는 장르. 우리나라에서는 황미나를 계기로 일대 도약을 이루게 되는 거죠. 그런데 김혜린은 황미나랑 비슷하면서도(특히 비천무의 그림은 '황미나風'이 더 짙게 느껴집니다) 더 '정치적인' 주제를 순정만화 장르에 쿵! 하고 던져넣지 않았습니까.
북해의 별의 정치적 색채는 비천무에서는 조금 뒤로 물러섭니다. 그렇지만 은연중에 작가가 느끼는 '부채의식'이 배어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더군요. 어쨌거나 북해의별로 순진한 소녀독자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줬던 김혜린이 그 다음 작품으로 '무협만화'를 생각해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가 비천무를 그린 시기는, '베르사이유 스타일'의 공주만화를 그리던 황미나가 '우리는 길잃은 작은새를 보았다'(얼마전 TV에서 방영되기도 했죠)로 빈곤과 사회적 갈등의 문제를 제기한 때와 일치합니다. 그러고보니 이 두 사람은, 사회적 이슈(주제의식의 심화)-장르의 다양화라는 점에서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발전해온 것 같습니다.
비천무라는 무협만화의 가장 큰 흠은 너무 도식적이어서 줄거리를 훤히 예측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얼굴 크고 몸통 작은 모여라 꿈동산型 인물들로 그려져서 서구적 데생에 익숙한 독자들에게 '못 그린 그림'으로 비쳐진다는 점.
그렇다면 강점은, 도식적인 줄거리임에도 잘 짜여져서 '장르만화'의 장기를 최대한 살리고 있다는 점, 그리고 머리큰 '동양형' 인물들이 자꾸 보다보면 더 새롭게 느껴진다는 점. 베르사이유의 공주들하고 중국 원나라의 소저하고 똑같을 수는 없잖습니까.
만화치고는 '유치한 재미'가 좀 없다는게 흠이라면 흠. 킬링타임용으로 읽으려면 해피엔드가 좋기는 하겠죠. 김혜린이라는 작가는 무협만화를 그리면서까지 자유니 이상이니 독재니 하는 말을 꼭 꺼내니까요. 그렇지만 역시 저력있는 작가고, 명작은 명작입니다.
(위의 그림은 <애장판> 1권 표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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