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네 책방

내 이름은 콘라드- SF도 이 정도면

딸기21 2000. 7. 21. 10:42
얼마전 '은하전기'라는 황당무계한 에스에프를 읽었습니다. 파란 머리에 뾰족한 귀를 가진 不老의 우주인들이 등장하는 만화같은 책이었습니다.

오늘은 일주일째 쥐고있던 '내이름은 콘라드'를 다 읽었습니다. 일주일째 쥐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첫부분이 좀 어려워서 그랬을 뿐이고 초반부를 넘기고서는 너무 재미있어서 사실 어제 거의 다 읽은 겁니다.


SF소설도 이 정도면, 철학서라고 해야할 겁니다. 책 주인인 마냐님은 이 책을 아주 높게 평가하지는 않으신 것 같은데, 전 정말 너무너무 재미있게 봤습니다. 
SF소설이면서도 문학적으로 매우 뛰어납니다. 이렇게 세련되고 독특한 책은 요 몇년간 처음 본 것 같습니다.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3일전쟁(핵전쟁)으로 지구는 방사능으로 오염되어 폐허로 변하고 돌연변이 괴물들이 오가는 '야생의 시대'가 돼버렸습니다. 인간들, 어머니 지구를 죽인 인간들은 '베가'라는 외계문명의 은총과 멸시 속에 '2등 행성민'으로 전락했습니다.

그런데 한 남자가 있습니다. 아주 오래 살면서 여러가지 이름으로 불리는 이 남자 콘라드는 한 베가인의 안내역을 맡아 지구의 유적들을 여행합니다. 돌연변이 괴물들과 살인청부업자 사이에서 베가인을 보호해주면서 여행을 하는 겁니다.

늙지도 않고, 오래도록 사는 사람, 게다가 그 사람이 희랍인이라면. 시간의 흐름속에 곳곳에서 출몰하는 이 사람은 마르께스의 소설 속 등장인물을 연상케 하면서, 동시에 희랍 신화를 떠올리게 합니다. 실상 그가 베가인을 비롯한 한무리의 여행자들과 함께 겪는 모험은 헤라클레스의 모험과 비슷합니다. 그의 소설속 직책 역시 '지구 문화유적 보호국장'입니다. 
모험 끝에 그가 베가의 명문가 후예로부터 지구를 상속받는다는 설정은 재미있습니다. 핵전쟁으로 폐허가 된 지구를 살려내는 일은 결국 신화와 역사, 다시말해 '인류의 문화'가 맡아야 한다는 거죠.

내용이 워낙 난해한 편이라서 사실 제 느낌을 그대로 정리하는 것조차 좀 어렵습니다만 황량한 지구, 괴물들, 냉소적이면서도 현학적인 문투, 페이지를 메우는 희랍신화와 고대의 싯구들, 매우 엽기적이고 오컬트한 이미지가 정말 매력적입니다. 무섭고 잔혹하면서도 아주 아름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