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네 책방

이제는 미국이 대답하라

딸기21 2000. 7. 11. 10:36
이제는 미국이 대답하라 
마틴 하트-랜즈버그 (지은이), 신기섭 (옮긴이) | 당대




미국의 진보적 학자인 마틴 하트-랜즈버그가 쓴 '한국현대사'입니다. 원제는 '한반도의 분단과 통일'인데 번역자가 '이제는 미국이 대답하라'라는 다소 도전적인, 명쾌한 '격문'으로 제목을 바꿔 붙였습니다.

이 책은 조선시대부터 개항기까지 한국의 역사를 개관하는 것을 시작으로, 해방 이후 한국의 분단과 그 과정에서 미국이 저지른 '악행'들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좌파 소장학자인 저자는 그중 해방공간에서 인민위원회-인공을 중심으로 한 한국민들의 자생적, 조직적 건국운동을 집중 조명합니다. 미국이 이를 어떻게 짓밟고 제네바합의를 무시한채 한국에 친미정권을 수립했는지를 밝혀내고, 그것이 남북한의 사회를 어떻게 왜곡했는지를 설명합니다. 
저자가 서문에서 '한반도의 분단과정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미국인들과 한국인들을 위해 책을 썼다'고 밝힌대로, 개괄적인 역사서이면서도 아주 명확하고 읽기가 쉽습니다. 사회과학 번역서인데도 책장이 술술 넘어간다는 점과 논리적 단순성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인 것 같습니다.

남북 정상회담을 계기로 한반도에 해빙무드가 무르익고 있습니다. 그런 한편에서는 미군의 노근리 학살과 베트남에서 한국군이 벌인 베트남인 학살이 이제서야 여론의 도마위에 오르고 있구요. 얼마전 뉴스를 보다가 '미군이 한국전쟁 때 왜 양민까지 죽였을까'하는, 뒤늦은 질문을 던져봤습니다. 왜 미군은 한국의 비무장 양민을 죽였을까. 이 문제는 '지금 이 시점에서 노근리 약살이 밝혀지게 된 것이 왜 중요한가'하는 문제와 곧바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이 질문 뒤에는 아마도 '문제제기 다음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할 것인가'하는 과제가 남아있겠죠.

'왜 양민을 죽였는가' 하는 질문이 중요한 것은, 양민학살 문제가 한국전쟁의 성격을 드러내는 결정적인 사안이기 때문입니다. 이 책의 저자는 이 문제에 대해 명확한 해답을 내놓습니다. '한국전쟁을, 미국이 대다수 한국인들의 의지에 반대하기 위해 개입한, 통일을 위한 내전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올바르다. 이 전쟁의 내전적, 대중적 성격 때문에 미군은 민간인과 적을 구별하기 어려웠고, 그래서 민간인 학살을 명령하게 됐다'.

저자는 광복이후 한반도에 아주 잠깐 동안 조선인민공화국이 수립됐었던 사실에 주목하면서 '민주적이고 사회주의 지향적이던 정부가 노동조합, 농민, 여성, 청년학생들의 강력한 지지를 받으며 조선을 지배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역사의 복원'이 중요하다'고 지적합니다. 즉 잔학생위를 제대로 이해하고 잔학행위를 인정하는 것이 진정으로 사회정의와 사회변화의 동력이 되게 만들려면, 더 폭넓은 역사적 맥락에서 이 사건들을 조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통일이 돼야 하는가'라는 질문 역시 '우문'으로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너무나 당위적인 문제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한편에서는 신세대들의 통일에 대한 무관심이 '구세대'들의 비난거리가 되고 있는 혼란스런 통일의식의 한편에서 저는 '통일의 당위성을 누군가가 논리적으로 설명해줬으면' 하고 바랬습니다. 통일을 통해 한국사의 제대로된 복원이 이뤄져야지만 남북한이 갖고 있는 모순의 해결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는 지적은 통일이 갖고 있는 '감정적 측면'을 넘어서 역사적 측면을 다시 살펴보게 해준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을 듯 싶습니다. 저자의 말마따나 '이 역사 복원은 북한과 미국의 평화와 화해의 대화가 시작되는 지점을 제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포스트모던이라는 화두가 한동안 젊은 학자들을 휩쓸고 지나가더니 어느새 'e의 시대''n의 시대'라면서 세상이 떠들썩합니다. 이렇게 떠들썩한 변화의 담론들에도 불구하고, 통일은 지나온 역사를 제대로 인식하는데에서만 시작될 수 있을 겁니다. 미국 젊은 학자의 한국 인식이 몹시 고맙게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 현대사를 제대로 복원해내고, 그 역사적 의미를 올바르게 해석하고, 거기에서 얻은 교훈을 화해와 협력의 바탕으로 만드는 일은 정말 '우리 머리와 손으로' 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