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작가 한스 벰만의 '돌과 피리'(전3권)를 읽었습니다. 동화적인 상상이 가득한 소설입니다.
'듣는귀'라는 소년이 이상한 돌을 손에 넣게 되고, 할아버지로부터 피리를 배우면서 세상을 여행합니다. 소설은 얼핏 중세 유럽의 시골을 배경으로 한 요정이야기 따위의 동화같으면서, 뒤집어보면 로드 무비식 성장소설의 전형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소년은 그렇게 어른이 되었다' 류의 단순한 성장소설은 아닙니다. 오히려 환상적인 소재들을 동원해 인간의 변화과정과 삶의 의미를 멋지게 은유해놓은 매력적인 '철학소설'이라고 해야 할 겁니다.
참 재미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궁금한 건, 왜 우리나라에는 일본에서 베껴온듯한 에스에프 귀신얘기 말고, 이런 환타지소설이 없을까 하는 겁니다.
문학사에는 문외한인 제가 알기에도 유럽에는 아서왕의 이야기가 있었고, 니벨룽겐의 노래도 있고, 드라큘라 얘기도 있고, 그런 것들이 현대에 와서는 대서양을 건너가서 오즈의 마법사라든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로 한층 젊어진 모습을 드러내고, 근래에는 해리 포터같은 마법 소년의 모험이야기로 변신을 거듭하면서 독자들을 매료시키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에겐 왜 그런 환타지의 장르가 남아있지 않은지 궁금해졌습니다. 우리한테도 고대 건국신화의 명목으로 남아있는 알에서 태어난 왕자 이야기, 하백의 딸 이야기, 약간 미스테릭하고 컬트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금오신화, 어릴 때 만화영화로 재밌게 봤던 도깨비감투, 선녀와 나뭇꾼 같은 것들이 있었는데, 근세에 들어와서 이런 '이상하고 아름다운 도깨비나라'들이 어디로 사라져버린 걸까요.
독일 작가의 소설을 읽으면서 우리의 환타지장르는 어디로 갔을까 하는 거창한 고민까지 하게 된 건, '돌과 피리'가 해리 포터류의 동화와는 달리 독일의 자연을 소설속에 잘도 버무려놨기 때문입니다.
시대적 배경도, 지리적 배경도 구체적으로 나와있지 않지만 그럼에도 소설을 읽다보면 상상속에 시퍼런 숲과 뒤틀린 나무들, 눈덮인 들판과 벼랑, 동굴속을 흐르는 개울물, 이끼로 덮인 호수 따위가 머리 속에 떠오릅니다.
저도 한번 상상을 해봤습니다. 딸기, 올빼미, 마녀, 도마뱀, 달팽이, 쎄미, 이런 다종다양한 '생물'들이 나오는 환타지소설을 머리속에 떠올리려 애썼는데, 잘 되지 않더군요. '마녀'니 '달팽이'니 '도마뱀'이니 하는 것은 이미 외국식 생각의 토양에서 나온 것이고, 딸기 또한 전래동화에서 본 적이 없죠.
제가 도시에만 살아서 그런지도 모르지만, 우리나라 자연을 한스 벰만처럼 멋있게 묘사할 문장들이 떠오르지 않는 것은, 제가 어려서부터 외국 문학을 읽고 자란 탓일 겁니다.
우리의 뒷세대들도 우리나라 산천을 속속들이 보여주는듯한 재미난 환타지 소설들을 읽을 수 있으면 참 좋겠다 라는 '교육적'인 생각을 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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