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앰버연대기

딸기21 2000. 11. 16.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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앰버연대기
로저 젤라즈니 (지은이) | 최용준 (옮긴이) | 사람과책 | 2010-07-09



판타지는 인류가 가져온 가장 오랜 문학 장르일 게다. 현대적인 판타지는 알다시피 톨킨이 '반지전쟁'에서 틀을 잡아놨다. 그 틀은 결국 '선과 악의 대립'인데, 착하고 용감한 주인공이 마계에 맞서 싸우는 게 가장 일반적인 구도다. 

로저 젤라즈니의 소설은 '판타지'에 해당되기는 하지만 주제가 상당히 철학적이다. '앰버 연대기'는 무지무지 재미있어서 정말 '손에 땀을 쥐고' 다음 권을 펼쳐야 하는(무려 5권!) 간만에 만난 재미난 소설이었는데, '어렵다'는 점에서는 같은 작가의 초기 소설인 '내 이름은 콘라드' 못지 않다. 그렇지만 훨씬 흥미진진하고 스릴이 있어서, 읽는 동안 날마다 잠자기전 '밤을 새울까 말까' 망설였을 정도다.

주인공인 '나'(코윈)는 어느날 미국 그린우드의 병원 침대에서 깨어나는데, 병원측이 자기 몸에 억지로 신경안정제 류를 투입하고 있다는 걸 알고 탈출을 한다. 자기를 강제 입원시켰다는 '여동생'을 찾아간 코윈은 놀라운 사실을 깨닫는다. 유럽에 전설의 '흑사병'이 창궐했을 무렵부터 수세기에 걸쳐 살아온 코윈은 '앰버'라는 곳의 왕자였던 것이다. 오랫동안 기억상실증에 걸려있던 코윈은 '형제자매들'을 하나둘 만나면서 기억을 되찾는다. 처음엔, 코윈의 '앰버 왕위 쟁탈전'인 줄 알았다. 실제로 초반부에는 코윈과 형제들간의 왕관 빼앗기 전쟁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런데 앰버가 어떤 곳인가 하면, '원질(原質)'에 해당되는 곳이다. 플라톤의 '이데아' 같은 걸 상상하면 된다. 앰버는 모든 것의 원형에 해당되는 본질적인 공간이고,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를 포함해 서로 다른 류(類)들이 사는 여러 세계는 앰버가 던진 '그림자'에 불과하다. 앰버의 왕자와 공주들은 그림자와 그림자 사이를 여행할 수 있으며, 타로 카드같이 생긴 트럼프를 이용해서 서로 통신과 왕래를 하기도 한다.

내용이 어찌나 복잡한지! 왕위쟁탈전에 뛰어들었다가 져서 한때 장님이 되어 지하감옥에 갇혔다 탈출한 코윈은 새로운 사실들을 조금씩 접하게 된다. 앰버는 모든 것이 원형인 동시에, 그에 대당(對當)하는 세상 또한 존재한다. 그동안 대권경쟁 내지는 '왕자들의 난'을 바라보는 관람객 입장이었던 독자들은 이 시점에서 코윈과 자기동일시를 할 수 있게 된다. 내가 '절대적인 것'이라고 알고 있던, 이 세상에 모든 '그림자'들을 남기고 그 '그림자 세상' 사이를 넘나들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고 알고 있던 앰버는, 그저 인간의 이상(혹은 이성, 심하게 말하면 자아도취)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앰버는 '질서의 세계'이고, 그보다 더 primary한 '혼돈의 세계'가 따로 있는데 바야흐로 '질서'와 '혼돈' 사이의 일대격전이 펼쳐지는 것이다!

무지하게 현학적인 말투, 뭔 판타지 소설이 이런가 싶게 사유적 철학적인 묘사 속에서도 긴장감은 더해간다. 둥, 둥, 둥, 북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이 편(앰버)에는 배신자가 나오고, 저쪽편(카오스)과의 사이에 로맨스도 생겨나고... 결말은? 이런 복잡미묘한 문제에 대해 작가가 결론 보여주는 것 보았는가(그렇다고 작가가 독자들 몫이라며 갑자기 꼬리내리고 내빼는 건 아니지만).

젤라즈니가 보여주는 세계는 기묘하면서도 황홀하고, 묘사하는 방식은 사변적인 것 같으면서도 화려한 영상처럼 머리 속을 채운다. '반전' 좋아하시는 분들도 만족할만한 몇 가지 반전도 있고, 아서왕의 아발론이나 그리핀, 유럽의 역사 같은 신화 퍼즐 맞추기를 할 수도 있다.

책장 덮고 나니 허탈하다. 덕택에 한 며칠 집에 떡 숨겨놓고 온 아이처럼 빨리 읽고 싶어서 근질근질했었는데 이제 또 무슨 재미로 살아야 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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