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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아와 카다피에 대하여

딸기21 2011. 2. 23.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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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의 카스트로가 뒷전으로 물러앉고 가봉의 봉고대통령이 죽은 지금, 세계 최장기 집권자라는 오명을 안고 있는 것이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 국가원수입니다. 본인은 오명이 아니라 너무 자랑스러워 더 하겠다고 저리 버티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대학교 때 ‘그린북’을 요약본으로 읽은 적이 있습니다. 내용은... 솔직히 생각 안 납니다. 하지만 그 때는 나름 참신한 느낌이었습니다. 내용이 참신해서가 아니라, 서방에서 악마처럼 묘사하는 카다피가 사실은 ‘훌륭한 생각을 하는 인물’이라는 사실 그 자체가 참신하게 느껴졌던 것 같습니다. 그 시절이라 해도 이미 카다피는 집권한지 20여년 된 인물이었으니, 참신하다 느꼈다는 게 우스꽝스럽습니다마는.

제 국민들을 전투기로 공격하고 있는 카다피라는 인물과 리비아 최근 역사를 다시한번 정리해봅니다. 기본 정보는 위키피디아를 바탕으로 했습니다.





무아마르 카다피는 1942년 6월 7일 지중해에 면한 리비아 북단의 항구도시 시르트의 베두인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이집트의 가말 압둘 나세르를 존경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건 사실 별로 얘깃거리가 되지 않는 것이, 당시 중동의 젊은이들 중에 나세르를 꿈꾸고 존경하지 않은 이들은 아마 거의 없었을테니까요. 나세르의 사회주의와 민족주의, 통칭 ‘범아랍주의’가 중동의 젊은이들에게 주었던 꿈, 그 열띤 분위기는 당시 중동을 다룬 책들마다 빠지지 않고 나오는 내용이랍니다.

Profile: Muammar Gaddafi

카다피 본인이 밝힌 바에 따르면 1959년 수에즈 위기(이집트가 수에즈 운하를 봉쇄하자 영국·프랑스·이스라엘 연합군이 이집트를 공격해온 사건) 때 자신도 반이스라엘 시위에 참여했었다고 하는군요. 불과 10대였던 카다피가 그 때 무슨 역할을 했겠냐마는... 군사학교 다니던 시절부터 왕정 전복을 꿈꿨고 나름 음모를 꾸몄다고 하니, 혁명가(내지는 음모가) 기질은 다분했던 것 같습니다. 카다피는 뒤에 그리스와 영국의 군사학교에서 훈련을 받았습니다.

군사쿠데타

1969년 9월 1일, 카다피가 이끄는 일군의 젊은 장교들은 이드리스 왕이 신병 치료차 터키에 체류하는 사이 무혈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합니다. 이드리스 왕의 조카인 사이드 하산 앗 사누시 왕세자는 혁명군에 축출돼 가택연금됐습니다. 왕정은 폐지됐고, 리비아아랍공화국이 출범함으로써 현대 리비아가 시작됩니다.

당시 카다피는 27세였습니다. 지금은 패션이 바뀌었습니다만(리비아의 유혈사태만 아니라면 카다피의 패션에 대해서 좀더 설을 풀어도 재밌겠지만 일단 생략하고...) 한동안 카다피의 상징이다시피 했던 사파리 수트와 선글라스는 당대를 휩쓴(?) 이른바 ‘체게바라 패션’의 아이콘이기도 했지요. 집권 이듬해인 1970년 카다피는 이탈리아계 주민들도 모두 추방해버렸습니다. 리비아는 30여년 간 이탈리아 식민지였기 때문에 이탈리아계 인구가 당시만 해도 좀 남아있었고, 지금도 이탈리아와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집권에 성공한 카다피는 혁명위원회를 만들고 의장 자리에 앉았습니다. 70년에는 총리로도 이름을 올렸지만 72년 타이틀을 내놓았습니다. 다른 군사혁명 지도자들과 달리 카다피는 제 머리에 별 다는 짓은 하지 않았고, 대위에서 대령으로 ‘상징적인’ 진급만 했습니다. 지금도 카다피의 계급은 대령입니다. 대령이 다스리는 나라... 카다피의 말인즉슨, 리비아는 “국민이 다스리는 나라”이므로 자기 계급이 낮다는 거였는데요. 지금 카다피가 벌이고 있는 짓을 보면 주인을 살육하는 종 이상도 이하도 아니로군요.

아랍 사회주의, 범아랍주의

카다피 치하의 리비아는 아랍민족주의와 복지국가 모델이 섞인 독특한 형태의 국가였습니다. 카다피가 ‘인민에 의한 직접 민주주의’ 혹은 ‘이슬람 사회주의’라 불렀던 방식입니다. 소규모 민간기업활동은 허용했지만 대규모 제조업이나 기업활동은 정부가 모두 맡았습니다. 복지와 교육을 강조했고, 거기에 이슬람 도덕률을 가미해 음주와 도박을 금지시켰습니다. ‘그린북’은 카다피의 이슬람 사회주의 사상이 집약돼 있는 안내서나 마찬가지입니다. 카다피는 1975년부터 79년 사이에 세 권의 그린북을 펴냈습니다.


카다피는 이번 사태 뒤 22일 리비아국영방송에 출연해서 '국민과의 전쟁'을 선포할 때에도 또 그린북을 들고 나왔습니다;;



1977년 카다피는 리비아가 ‘공화국’에서 ‘자마리야’로 넘어갔다고 선언합니다. 자마리야 혹은 줌후리야(이집트 식으로는 곰후리야)는 모두 ‘공화국’으로 번역됩니다. 카다피는 용어의 차이를 두어, 리비아가 서구 근대의 산물인 공화국과 다른 ‘대중들이 (직접) 지배하는 나라’로 진화했다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앞서 리비아의 독특한 정치구조에서 설명한 ‘공화국 부문’의 인민의회-인민위원회 구조가 카다피가 말하는 ‘자마리야 구조’라 이해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지역 차원에서는 인민위원회가 일종의 꼬뮌처럼 기능을 하는 것이고, 중앙 차원에서 그 정점에는 인민의회의 사무총장(서기장?)인 카다피가 있는 것이죠. 그러나 1979년, 카다피는 새로운 ‘평등주의 철학’을 내세워 다시한번 모든 직책을 내려놓습니다.

범아랍주의 시기

대외적으로 카다피는 나세르의 범아랍주의를 표방했습니다. 70년 9월 28일 나세르가 숨지자 카다피는 아랍 민족주의 영웅의 빈 자리를 자신이 채우려는 열망을 가졌습니다. 나세르는 생전에 이집트, 시리아, 이라크를 엮어 아랍공화국을 출범시킨 적 있습니다. 물론 이 세 나라의 통일은 10여년만에 깨졌습니다만.

카다피는 나세르를 흉내내어 1972년 리비아, 이집트, 시리아를 묶은 ‘아랍공화국연합(Federation of Arab Republics)’의 출범을 선언합니다. 하지만 세 나라 모두 통일을 원치 않았고, 결국 카다피는 눈을 다른 데로 돌려 1974년 튀니지의 하비브 부르기바 대통령(Habib Ali Bourguiba. 이 사람은 터키의 케말 아타튀르크에 비견되는 친서구 개혁가이자 현대 튀니지공화국을 세운 건국 영웅 겸 초대대통령입니다. 부르기바가 1987년 병으로 쓰러지자 대통령직을 물려받은 뒤 이제껏 독재를 해온 것이 얼마전 혁명으로 쫓겨난 벤 알리랍니다)과 국가 합병 합의를 했습니다. 물론 서로 생각이 달라 실행에 옮겨지지는 않았지만.



카다피식 외교- '반미는 모든 것'

나세르는 중동의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아랍 혁명’과 ‘공화국 정신’을 심어주었습니다. 카다피는? 카다피는 42년 장기집권하는 동안 ‘반미를 위한 모든 것’을 했습니다.

카다피는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 최대 후원자였습니다. 79년 이집트의 안와르 사다트는 이스라엘과 전격적으로, 몰래, 평화협상을 체결하고 자기네 나라에 있던 팔레스타인인들도 추방·억압합니다. PLO를 지원해주는 리비아와, 팔레스타인 뒤통수 때린 이집트 사이가 급속 나빠지는 계기가 됐지요(하지만 카다피도 1995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평화협정을 체결하자 PLO 조직원을 비롯한 자국 내 팔레스타인인 3만명을 추방해버렸습니다).

카다피는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이슬람 국가들을 연결하고, 이 일대 반독재·반외세 투쟁에 나선 게릴라들을 밀어줬습니다. 카다피는 어떤 그룹이든 반미, 반제국주의 투쟁을 내세우기만 하면 무기와 재정지원을 해줬습니다. 지금은 국제전범재판을 받고 있는 라이베리아의 인간 백정 찰스 테일러도 리비아의 반미캠프에서 훈련받았다죠.

이런저런 이유들로 해서 카다피는 미국과 유럽에 ‘국제 테러지원 범죄자’로 낙인 찍혔습니다. 카다피가 72년 뮌헨 올림픽 테러를 저지른 ‘검은 9월단’을 지원해줬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영국과 리비아와 미국이 엮여 갈등을 빚었던 88년 팬암기 폭파사건(로커비 사건)도 카다피 정권의 소행으로 추정됩니다.

카다피와 소련의 관계는... 좀 미묘합니다. 냉전시절 공산주의 블록이 아닌 나라들 중에 소련의 초음속 미그25 전투기를 최초로 공급받은 것이 리비아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소련과 리비아는 거리가 먼 만큼이나 데면데면한 관계로 계속 남았습니다. 카다피는 중동 역내에서 리비아의 영향력을 키우고 싶어했고, 제3세계 해방투쟁들을 스스로 지원하고 싶어했으니까요. 또 사회주의를 강조하긴 했지만 마르크스-레닌주의와는 거리를 두었습니다.

비록 반미주의자에 ‘테러지원’ 혐의를 쓰고 있었지만, 카다피라는 인물에 대한 미국의 평가는 아주 냉혹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카다피는 유혈사태를 일으켜 집권한 게 아니었고(다시 또 지금의 풍경이 겹쳐집니다만) 공산주의 진영도 아니었으니까요. 1976년 미국의 한 외교관이 카다피에 대해 내린 평가는 “실용적인 지도자”라는 거였다고 합니다.

레이건의 음모

미국과 리비아가 완전히 웬수;;지간이 된 것은 80년대 미국 로널드 레이건 정권 때였습니다. 미국은 카다피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한 공작을 했습니다.

그렇게까지 한 이유에 대해서는 해석이 분분합니다만... 미국은 79년 이란 호메이니의 이슬람 혁명이 던진 핵폭탄에 얻어맞아 정신없을 때였습니다. 미국의 가장 큰 적은 (소련보다도) 반미 이슬람 신정체제를 채택한 이란이었습니다. 이란의 혁명은 미국의 중동전략 전체를 뒤흔들었으니까요. 한마디로 사냥하는 데 사냥개(파흘라비 왕조)가 사라진 꼴이랄까...

미국의 사냥개 두 마리는 이스라엘과 이란이었는데 이란의 파흘라비라는 개가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미국은 이라크의 후세인을 부추겨 이란을 공격하게 했고, 8년에 걸친 이란-이라크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이 때 카다피는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건설이라는 목표를 흔들림 없이 지지했고 이란-이라크 전쟁에서도 이란을 지원했습니다. 레이건이 카다피 전복 공작을 펼친 배경입니다. 레이건은 카다피를 “중동의 미친 개(mad dog of the Middle East)라 불렀다고 합니다.

1981년 12월 미국은 자국민들의 리비아 여행을 금지시켰습니다. 이듬해 3월에는 리비아 석유 수입금지와 미국산 석유화학제품의 리비아 수출을 모두 금지하는 제재에 돌입했습니다. 하지만 유럽국들이 따르지 않아 리비아 금수는 별로 효과가 없었고, 그 사이에도 카다피는 서사하라에서 스페인 식민주의와 모로코의 무력점령에 맞서 싸우던 ‘폴리사리오 전선(Frente Polisario)’ 반군에 대한 지원을 계속했습니다.



트리폴리 공습

1986년 3월 미국은 리비아 시드라 만을 순찰하고 있던 리비아측 배를 공격, 도발을 합니다. 그리고 한달 뒤인 4월 15일 레이건은 트리폴리 공습을 지시합니다. 이름하여 ‘엘도라도 캐년 작전(Operation El Dorado Canyon).’ 수도인 트리폴리와, 이번 시위사태의 도화선이 된 2대 도시 벵가지가 폭격을 받아 리비아 군인·공무원 45명이 숨지고 민간인 15명이 희생됐습니다.

공습 열흘 전 서베를린의 디스코텍에서 폭발사건이 일어나 3명이 숨졌는데, 미국은 리비아 대사관을 도청해 리비아 측이 테러 배후에 있다는 정보를 빼냈습니다. 그걸 빌미로 폭격을 했던 거지요. 그러면서 미국은 테러에 대한 ‘보복 공격’이라 주장했습니다(전세계에서 보복공격이란 말을 가장 많이, 허구헌날 하는 나라는 이스라엘인데 이게 다 미국한테 배운 거랍니다). 트리폴리 공습으로 숨진 사람 중에는 카다피가 입양한 딸 한나도 포함돼 있었습니다.

리비아는 미군의 공습기지로 쓰인 이탈리아의 람페두사 섬에 스커드 미사일 2기를 발사했으나 모두 지중해에 떨어지고 말았다는... 이 무렵에는 영국도 리비아와 몹시 사이가 안 좋았고, 카다피가 북아일랜드해방군(IRA)을 지원하고 있다고 주장했고, 콜롬비아의 우파정권도 카다피가 무장게릴라인 콜롬비아혁명군(FARC)을 밀어주고 있다고 비난했고...

여튼 로커비 사건 용의자 인도 문제 등등으로 90년대 내내 카다피는 서방의 손가락질을 받았고, 리비아는 경제제재를 당했습니다.

*잠시 샛길로-
너무나 존경하는 넬슨 만델라... 카다피가 모두의 손가락질을 받을 때에, ‘의리’를 지킨 사람은 만델라 할아버지였습니다. 지금도 기억이 납니다. 만델라 할아버지가 97년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트리폴리를 방문했습니다. 그 때 할아버지 말씀은 “미국과 유럽 모두 남아공의 흑인들을 버렸을 때 우리를 도와준 것은 카다피였다.” 그렇게 의리를 지켰습니다. 지금 할아버지가 카다피를 보면서 얼마나 혀를 차고 계실까...


핵계획 포기선언과 대미관계 복원

만델라와 코피 아난 당시 유엔 사무총장의 중재로 카다피는 용의자 2명을 인도하고 네덜란드에서 로커비 사건 재판을 받게 한다는 데에 동의했습니다. 미국은 이란-리비아 제재법안(일명 다마토법안과 그 후속법안들)을 그대로 유지했지만 리비아에 대한 제재는 사실상 풀었습니다.

2003년 미국은 이라크를 공격해 사담 후세인 정권을 축출했습니다. 철권 통치자 후세인의 처참한 몰락을 지켜본 카다피는 느낀 바가 많았던 모양입니다. 이듬해 ‘자발적으로’ 대량살상무기 개발 계획(개발 단계에 들어가지는 않았고 계획만 있었던 수준)을 포기한다고 선언합니다. 부시네 정권은 이라크 공격이 대량살상무기 확산을 막는 데에 효과가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선전했지요.

유럽은 발 밑의 산유국 리비아가 문을 열고 나온 것을 손 벌려 환영했습니다. 프랑스는 리비아의 핵발전을 돕겠다 약속했습니다. 2004년 3월 토니 블레어가 서방국 정상으로서는 금수조치 시작 이래 처음으로 리비아를 방문해 카다피와 만났습니다(블레어는 그 뒤로도 여러 차례 카다피와의 친분을 과시했는데, 그 대가로 BP를 위한 유전개발권을 따내줬다는 분석이 많습니다).

2006년 5월 미 국무부는 리비아와 모든 외교관계를 복원한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의 리비아 방문(2007년),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의 방문(2008년) 등이 이어졌습니다. 심지어 라이스는 카다피 아들과의 연애설, 결혼설이 돌기도 했지요. 2008년 8월 카다피는 과거의 식민통치에 대한 보상금 50억 달러를 받기로 합의하고 이탈리아의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와 벵가지에서 협정을 체결했습니다.

범아프리카주의

근래 카다피의 행보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씨알 안 먹히는 범아랍주의를 버리고 아프리카 쪽으로 발걸음을 돌린 것이었습니다. 2009년 2월 에티오피아에서 열린 아프리카연합(AU) 정상회의에서 AU 의장으로 선출된 뒤 “아프리카합중국(United States of Africa)”을 건설하자고 기염을 토한 것은 유명하지요.

카다피는 오일달러를 아프리카 국가들에 퍼부으며 환심을 샀고, 언제 아랍사회주의를 주창했나 싶을 정도로 아프리카에 다가서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2008년 8월에는 벵가지에서 희한한 예식을 열고, 아프리카 전통 부족 지배자들과 왕들 200여명(여기서의 '왕'은 국가의 왕이 아니라 아프리카 여러 국가에 지역별로 남아 있는 형식상의 부족 왕을 말하는 겁니다)을 모아놓은 뒤 스스로 '아프리카의 왕 중의 왕'이라는 타이틀을 취하기도 했습니다.


왕 포스 마구마구 나기 시작... -_-

제 기억에, 2000년대 중반 이후 카다피의 행보는 거의 과대망상증 환자스럽다는... 외국 순방하면서 자기가 묵을 베두인 천막을 칠 땅을 달라고 하는 거라든가, 사파리 차림에서 갑자기 중세의 왕이나 된듯 전통의상 가운 펄럭이고 다니는 모습이나... 2009년 카다피가 아프리카 왕들 포럼을 열려고 했는데 우간다가 “우리 헌법상 위배된다”고 반대해 무산돼 버린 일 등등 온갖 해프닝들이 있었습니다.

* 다시 샛길- 리비아 대수로
카다피의 ‘치적’ 중 가장 먼저 거론되는 것이 뭔지 아십니까? 바로 한국의 모 건설회사가 주축이 되어 만든 사하라 사막의 대수도관입니다. 누비아의 사막지대에서 트리폴리, 벵가지, 시르트를 잇는 거대한 인공 강을 만드는 대역사였죠. 물에 대해 공부하는 학자들은 사하라 대수층(지하수층)을 고갈시키는 짓이라 비판하고 있습니다만...


카다피의 가족들

현 부인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출신인 소피야 파르카스입니다. 두번째 부인이고요. 카다피의 자식은 7남 1녀에 입양아 2명입니다. 장남인 무함마드는 첫째 부인 소생으로, 리비아올림픽위원회를 이끌고 있습니다. 차남부터는 모두 둘째부인 소피아의 자식들입니다.

▶ 카다피 가족에 대해서는 김향미 기자의 기사('정권 수호 나선 카다피 아들들') 참조

차남 사이프는 건축학을 전공했고 런던경제대학에 유학한 엘리트로, 카다피 재단을 만들어 이끌고 있습니다. 한때 자기 아버지를 비판해 눈길을 끌기도 했는데... 2006년 아버지를 향해 쓴 소리를 했다가 잠시 리비아를 떠나 있었지요. 좀 있다 들어와서는 어린이 환경교육 등등에 관한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버지를 대신해 강경진압을 주도하는 듯 비치는군요.

네째 아들 무타심은 군 대령입니다. 현지 국가안보위원회 자문위원으로 일하고 있고... 사이프와 함께 카다피의 후계자로 거론돼왔습니다. 세째아들 사아디는 리비아축구연맹을 이끌고 있습니다(사아디는 이탈리아 세리아의 삼프도리아에서 잠시 선수로 뛰기도 했었죠. 그 때 돈내고 구단에 들어갔다는 소문이..;; 여담입니다만 2002년에 카다피는 유벤투스의 지분 7.5%를 2100만달러에 사들여서 눈길을 끈 바 있습니다. 유벤투스 구단주는 피아트로 유명한 아녤리 가문인데, 이모저모로 이탈리아와 리비아의 관계가 돈독해졌다는...).

세째아들과 비슷한 돌발 캐릭터는 다섯째아들 한니발입니다. 리비아산 원유수출을 담당하는 국영 해운회사에서 일하고 있습니다만, 이탈리아에서 경찰을 소화기로 두드려 팬다든가 파리 샹젤리제에서 포르쉐를 몰고 신호등 무시 돌진운전을 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종종 물의를 빚었습니다. 모델 애인을 구타해서 고소당하기도 했죠(그녀는 지금 한니발의 부인이 되어있다능).

6남 사이프 알 아랍과 7남 카미스는 모두 경찰 간부. 유일한 딸 아에샤는 변호사입니다. 입양한 자녀 한나와 믈라드 2명이 있었는데 한나는 트리폴리 공습때 숨졌지요. 입양한 아들 믈라드는 원래 카다피의 조카였는데 86년 트리폴리 공습 때 카다피의 목숨을 구해줘서 각별한 관계가 됐다 하고요.

덤으로, 좀 뜬금없는... 카다피 딸 아에샤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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