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주의라는 주제 자체를 전면에 내세워 분석한 책들이 국내에 많이 출간돼 있지는 않다. 박경태의 《인종주의》(개념사, 2009)는 인종·인종주의의 정의와 역사를 소개한 책으로, 한국 사회에서의 다문화주의 논의와 인종주의적인 양상 등을 덧붙였다. 폴 C. 테일러의 《인종: 철학적 입문》(강준호 옮김, 서광사, 2006)은 인종주의의 철학적 측면을 다루면서 인종주의-반인종주의 사이의 윤리학을 다루고 있다.
인종주의가 힘을 발휘하는 양상은 매우 다양하다. 때로는 특정 인구집단에 대한 노골적인 학살이라는 극단적인 형태를 띠기도 하지만, 계급적-성적-지리적 차별구조 속에 뒤섞여 있어 골라내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인종주의의 얼굴과 그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런 차별구조들을 다룬 다양한 책들을 읽어볼 것을 권한다.
루이기 루카 카발리-스포르차 지음, 이정호 옮김, <유전자, 사람, 그리고 언어>, 지호, 2005
아프리카에서 탄생한 현생 인류의 조상들이 지구상으로 흩어져나간 과정을 유전적, 언어학적으로 분석한다. 수학적 모델을 능숙하게 다루는 것으로 유명한 저자는 여러 모델을 곁들여 초창기 인류의 지구적 이동을 설명해낸다.
저자는 이 연구가 인종차별에 맞서기 위한 작업임을 명시하고 있다. 인류는 기나긴 시간 동안 생물학적, 문화적 변이를 거쳐 왔다. 많은 이들이 문화적 변이와 생물학적 변이를 혼동한다. 아프리카의 대학생 숫자가 상대적으로 적다고 해서 미국인들보다 머리가 나쁘다고 생각하는 식이다. 인종주의는 ‘이러한 우세함이 생물학적으로 결정된다고 믿는 것’(p.21)이다.
생물학적 변이 중에도 ‘눈에 보이는 변이와 보이지 않는 변이’가 있다. 게다가 지구는 둥글다. 유전적 변이는 불연속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세상에는 얼굴이 검은 사람/흰 사람/노란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중간 정도로 갈색인 사람, 많이 검은 사람, 옅은 갈색인 사람 등등 이 지구를 덮고 있다. 수많은 중간단계들이 이어져 있는데 사람들은 그걸 무시하고 단순화의 덫에 걸린다. 더욱이 인종주의의 가장 강력한 기준이 되는 피부색과 몸의 크기는 인간 진화 전체에선 아마도 최근에야 진화한 형질로 보인다(p.25). 저자는 ‘인종적 순수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에드워드 사이드 지음, 박홍규 옮김, <오리엔탈리즘>, 교보문고, 2007
팔레스타인 출신의 석학 에드워드 사이드의 역저. 당초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은 구미의 예술가들이 동양문화를 모방하거나 묘사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 즉 ‘동양풍(風)’을 지칭하는 것이었으나, 사이드가 1978년 이 책을 펴내면서 의미가 바뀌었다.
사이드는 서양인들이 동양을 볼 때에 자신들보다 신체적으로나 지적으로나 열등하다는 전제를 깔고 있고, 그 바탕에서 동양 문화를 묘사함으로써 동양인들의 열등함을 은연중 부각시킨다고 주장했다. 이를 통해 동양은 주체성을 잃은 채 ‘서양의 눈으로 본 동양’으로 변질되고, 서양의 방식대로 재구성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사이드가 가리킨 동양은 오늘날의 아시아라기보다는 유대인·아랍인을 포괄하는 의미의 ‘셈족’이었다. 특히 사이드는 18~19세기 유럽의 이집트학 열풍을 예로 들면서 유럽인들의 이중적 감수성을 폭로했다. 하지만 사이드 이후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용어는 서양의 동양에 대한 경멸적이고 전형화된 시각을 통칭하는 말로 의미가 확장됐다. 출간된지 오랜 세월이 지나긴 했지만 서구/백인들이 타자를 해석하고 자신들의 우월성을 정당화하는 문화적인 방식을 분석해낸 선구적인 책이다.
프란츠 파농 지음, 이석호 옮김, <검은 피부, 하얀 가면>, 인간사랑, 1998
파농은 프랑스령 마르티니크 섬 출신의 정신과 의사였다. 2차 대전 때에는 프랑스 군에 지원해 전투에 참여하기도 했으나, 1954년 알제리로 건너가면서 프랑스에 맞선 반제국주의 투쟁에 투신했다. 1952년 알제리 정신병원에서의 임상경험을 바탕으로 저술한 이 책은 식민지의 비백인들이 겪어야 하는 정신장애를 분석한 것이다. 그는 ‘흑인성’이라는 것이 식민 사회 전체에 ‘정신적, 신체적으로’ 각인돼 있다고 주장했다. 이 책을 계기로 ‘식민주의 심리학’이라는 용어가 나오기도 했다.
데릭 젠슨 지음, 이현정 옮김, 《거짓된 진실》, 아고라, 2008
1918년 미국 조지아주에서 ‘감히 남편을 죽인 백인들에게 복수를 선언했던 겁 없는 흑인 임신부’가 처참하게 고문살해되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계급·인종·젠더를 관통하는 증오의 문화’가 이 책의 주제다.
인종차별, 흑인 린치, 강간, 홀로코스트, 인디언 학살, 기타 등등의 폭력에 대해 저자는 일단 증오범죄라는 이름을 붙인다. 근대의 형성 과정에서 증오범죄의 주요 가해자는 ‘서구 백인남성’이었기에, 저자는 증오의 문제를 이야기하면서 자기 자신도 포함되는 ‘서구 백인남성 집단’의 증오감정을 들여다보는 것에서 출발한다.
결론은 현 세계 사회·경제체제를 특징짓는 범죄의 바탕에 깔린 증오감정이 개인적인 현상이나 개인의 신체적 감정에서 나온 것이 아니며, 체제의 일부이자 근원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증오의 사회학, 증오범죄의 메커니즘이야말로 (서구에서 시작돼 이미 지구를 장악해버린) 우리 ‘문명’의 특징이라고 결론짓는다.
저자는 인종과 관련된 범죄를 다른 증오범죄들과 구분 짓지는 않지만, “홀로코스트와 흑백분리의 시대가 지나간 지금도 인종차별이 만연하는 이유”에 대한 통찰력을 준다.
스벤 린드크비스트 지음, 김남섭 옮김, <야만의 역사>, 한겨레출판, 2003
스웨덴의 학자 겸 저널리스트인 저자는 알제리 내륙에서 니제르 북단까지 이어지는 북아프리카 ‘사막의 길’을 걸으며 19~20세기 유럽의 아프리카 식민지 점령이 어떻게 ‘야만’을 생산해냈는지를 재구성해낸다. 이 여행의 목적은 분명하다. 20세기 유럽 한복판에서 벌어진 유대인 학살이라는 야만적인 사건이 허공에서 떨어져내린 것이 아니라는 것, 유럽인들 자신의 과거에서 배태된 것임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유럽인들은 나치즘의 논리야말로 자신들이 아프리카에서 펼쳤던 ‘절멸의 논리’에 입각한 것이라는 부인하고 있다. “야수들을 절멸하라”는 근대 인종주의와 사회진화론의 논리로 영국인, 프랑스인, 스웨덴인, 벨기에인들이 아프리카의 한 부족 한 부족을 절멸시키는 동안 독일에서는 그것을 본뜬 ‘레벤스라움(생활공간)’이라는 개념이 싹텄다. 내 살 곳을 만들려면 남의 살 곳을 빼앗아야 하고, 열등한 야수들은 죽이거나 노예로 만들어버린다는 개념. 그것이 홀로코스트의 기본 발상이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모래바람 날리는 북아프리카 사막길과 유럽을 교차시키며 식민주의와 인종 대학살의 고리들을 파헤친다.
찰스 W. 밀스 지음, 정범진 옮김, 《인종계약-근대를 보는 또 하나의 시선》, 아침이슬, 2006
근대문명의 출발점이 된 서유럽 사회의 형성과정에서 주축이 되었던 것이 ‘사회계약’이 아닌 ‘인종계약’이었다는 주장에서 출발한다. 저자는 인종계약이 전지구적 차원에서 유럽의 경제적 지배와 백인의 특권을 만들어낸 바탕이 돼있다고 본다. 이 계약은 때로는 폭력을 통해, 때로는 이데올로기 조작이나 개인에 대한 규범화(인종화)를 통해 작용한다.
토니 모리슨 지음, 김선형 옮김, 《빌러비드》, 들녘(코기토), 2003
토니 모리슨 지음, 신진범 옮김, 《가장 푸른 눈》, 들녘(코기토), 2003
토니 모리슨 지음, 김선형 옮김, 《재즈》, 들녘(코기토), 2001
미국 작가 토니 모리슨의 소설들은 미국 사회에서 흑인들이 겪어야 하는 ‘보이는, 그리고 보이지 않는 차별’을 섬세하고 생생하게 다루고 있다. 첫 작품인 《가장 푸른 눈》은 1970년에 발표한 것으로, ‘금발에 파란 눈’이 미의 기준으로 여겨지는 사회에서 흑인 소녀가 겪는 소외감을 그렸다. 1987년 작 《빌러비드》는 딸이 노예가 되는 것을 막으려 딸을 죽이는 선택을 해야 했던 흑인 여성의 스토리로 미국 사회에 충격을 안겼다. 이 작품으로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치정사건에 가까운 살인사건을 모티프로 흑인 공동체의 민속과 문화를 펼쳐 보인 《재즈》로 1993년 미국 흑인으로서는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조셉 콘라드 지음, 이상옥 옮김, 《암흑의 핵심》, 민음사, 1998
영화 <지옥의 묵시록>의 원작소설로 유명하지만, 의외로 이 무겁고 우울한 책을 읽는 이들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이 책은 인종 이전에 ‘아프리카에 관한 이야기’다. 밀림과 질병과 ‘흑인들’로 가득한 검은 대륙을 맞닥뜨린 유럽이 어떤 방식으로 그 땅을 수탈하면서 스스로 미쳐가는 지를 그렸다.
소설은 ‘말로’라는 이름의 한 선원이 아프리카에서 상아 운반선의 선장으로 일하던 때를 회고하는 형식으로 돼 있다. 그는 식민지에서 흑인들의 손목을 잘라가며 상아를 채취하는 한 벨기에 무역회사에 고용돼, 위험을 무릅쓰고 오늘날의 콩고와 콩고민주공화국을 흐르는 콩고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항로에 오른다.
항행의 목적은 현지 관리인이 내륙에 모아놓은 상아더미를 싣고, 관리인을 데리고 내려오는 것이다. “어릴 적부터 지도의 빈 부분을 보면서 ‘가고 싶다’는 꿈을 키웠던” 말로는 ‘비어 있는’ 아프리카 땅에서 인간 같지도 않은, 그러나 인간이 아닌 것도 아닌 검은 존재들을 본다. 그들 사이사이에 들어가 악행을 벌이는 비겁하고 안일하면서 이기적인 백인들을 본다. 그는 아프리카의 속살 즉 ‘암흑의 핵심’을 향해 점점 다가간다. 내륙에 몇 년 째 체류했다는 관리인은 현지 직원들에게는 영웅 대접을 받는데, 실제로는 흑인들 머리를 잘라 울타리 기둥 장식을 하는 종류의 인간이다.
하지만 흑인들의 숭배를 받았다던 ‘위대한 정신의 소유자’는 말로가 목적지에 도착하자마자 허망하게 쓰러져 죽는다. 그가 남긴 말은 두 마디, “무서워라! 무서워라!”였다. 무시무시하고 야만적인 식인종들, 저 어둠의 자식들을 백인 식민주의자의 마지막 말. 죽어가는 상아회사 관리를 두렵게 만든 것은 아프리카의 ‘끔찍한 야만인들’, 그 스스로가 만들어낸 식민지의 잔인한 진실들, 그 모든 것을 가능케 한 인간의 내면 그 자체였다.
이야기를 전하는 말로는 식민주의를 자랑스러워하지도, 창피해하지도 않는다. 그냥 담담하게 ‘묘사’할 뿐이다. 그 ‘뻔뻔함’ 혹은 ‘담담함’이 오히려 잔혹함을 더욱 효과적으로 드러내 준다. 미국 우파 저널리스트 로버트 카플란의 르포 <다가오는 무정부주의(Coming Anarchy)>와 스벤 린드크비스트의 <야만의 역사> 등은 모두 이 소설을 모티브로 삼아 아프리카를 조망하고 있다.
볼프강 벤츠 지음, 최용찬 옮김, 《홀로코스트》, 지식의풍경, 2002
라울 힐베르크 지음, 김학이 옮김, 《홀로코스트-유럽 유대인의 파괴 1, 2》, 개마고원, 2008
볼프강 벤츠의 《홀로코스트》는 생존자 인터뷰와 관련 기록 등을 통해 나치의 유대인 학살의 모든 과정을 꼼꼼히 기록한 책이다. 여전히 홀로코스트 자체를 부정하는 극우집단과, 과거사에 대한 반성을 뒤짚어엎으려는 이른바 독일 ‘수정주의’ 역사학자들에 대한 반론이다.
라울 힐베르크의 《홀로코스트-유럽 유대인의 파괴 1, 2》는 중세에서부터 나치까지 이어지는 유럽의 유대인 탄압 역사를 꼼꼼히 들여다보고, 이런 역사적 배경이 나치의 이데올로기에 핵심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말한다. 즉 홀로코스트는 어느날 갑자기 히틀러라는 미치광이의 등장으로 전면에 부상한 것이 아니라 유럽의 역사 속에 내재하고 성장해온 것이라는 주장이다. 평범한 독일 관리가 어떻게 나치즘 체제 아래에서 가스실의 스위치를 올리는 ‘학살 기계’가 되었는지, 그 ‘가해의 과정’을 업무프로세스 분석하듯 재구성하고 있다.
론 버니 지음, 심우진 그림, 지혜연 옮김, <독수리의 눈>, 우리교육, 2000
도리스 필킹턴 지음, 김시현 옮김, <토끼울타리>, 황금가지, 2003
국내에선 흔치 않은 호주 동화들이다. 론 버니의 《독수리의 눈》은 원주민 피나무리 족 아이들의 눈을 통해 본 애버리지니(aborigine·원주민) 수난사다. 백인들에게 가족이 몰살당하는 것을 본 원주민 소년 구답은 사촌누이 유당과 함께 살아남으려 도망친다. 간신히 살아남아 다른 원주민 부족을 만나서 안정을 찾는가 하면 다시 또 백인들이 나타난 공동체를 절멸시킨다. 아이들은 그렇게 계속 도망을 치고, 동족의 죽음과 공동체 문화의 파괴를 목도한다.
제아무리 ‘독수리의 눈’을 가졌을지라도 아직 어린 아이일 뿐인 구답에게, 천둥막대기(총)를 들고 커다란 들개(말)을 탄 백인들을 피해 달아다는 것은 너무나 힘든 일이다. 동화라고는 하지만 결말은 결코 동화적이지 않다. 애버리지니들의 역사는 “그래도 잘 도망쳐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나지 않았다.
저자는 ‘착한 백인’과의 화해 따위, 환상에 불과한 결말도 내놓지 않는다. 소년과 소녀는 끝까지 안식처를 찾지 못한다. 계속 도망칠 뿐이다. 동화라는 외피 속에 담긴 원주민들의 ‘역사’는 너무나 단순하다. 백인들은 원주민을 짐승처럼 ‘사냥’했고, 원주민들은 희생됐다.
도리스 필킹턴의 《토끼울타리》는 한 차례 ‘사냥’의 시기를 지내고 난 백인들이 원주민 공동체를 망가뜨리는 방법으로 고안해낸 강제 분리정책을 다루고 있다. 책의 주인공은 원주민과 백인들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 자매들이다. ‘혼혈아들을 원주민들 틈에 버려둘 수 없다’는 이유로 당국은 세 소녀를 이름만 학교일뿐인 강제수용소에 넣는다.
소녀들은 그 곳을 탈출해, 백인들이 쳐놓은 토끼막이 울타리를 따라 2400km를 걸어 집으로 돌아온다는 이야기다. 책에는 백인들이 얼마나 잔혹하게 원주민들을 죽였는지, 그리고 원주민들의 자녀를 부모에게서 억지로 떼어냈는 지와 같은 것들은 들어 있지 않지만 백호주의의 또 다른 측면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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