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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의 역사- 아우슈비츠를 만든 것은 당신들이다

딸기21 2007. 7. 9.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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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의 역사 Exterminate All The Brutes (1996) 

스벤 린드크비스트 (지은이) | 김남섭 (옮긴이) | 한겨레출판 | 2003-04-25



‘폭격의 역사’에서 20세기의 가공할 폭격들 뒤에 숨겨진 인종주의의 얼굴을 보여주며 묵시록과 같은 어두운 미래상을 그려보였던 스벤 린드크비스트가, 이번엔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른 과거로의 여행을 치른다. 이 여행은 즐기며 구경하며 가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들여다보고 스스로를 상처내며 치러내야하는 그런 여행이다.


알제리 내륙에서 남쪽으로 접경한 니제르 북단까지 이어지는 북아프리카 ‘사막의 길’이 린드크비스트의 경로다. 조셉 콘라드의 ‘어둠의 한가운데’를 화두 삼아 린드크비스트는 19세기, 20세기 유럽의 아프리카 식민지 점령이 어떻게 철저한 야만을 생산해냈는지를 재구성해낸다. 
 

아프리카인들을 유럽인들이 얼마나 끔찍하게 초토화시켰는지 더 말해 무엇하랴마는, 저자의 여행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다. 유대인 학살로 대표되는 20세기 유럽 한복판에서 벌어진 야만적인 사건이 허공에서 떨어져내린 것이 아니라는 것, 유럽인들이 인정하는 척하면서 사실은 부인하고 있는, 오늘날까지도 감추려고 하고 있는 그들 자신의 과거에서 배태된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유럽인들은 나치즘을 다각도로 규명하려 하면서도 나치즘의 논리야말로 자신들이 아프리카에서 펼쳤던 ‘절멸의 논리’에 입각한 것이라는 점은 끊임없이 부인하고 있다. 


“야수들을 절멸하라”는 근대 인종주의와 사회진화론의 논리로 영국인, 프랑스인, 스웨덴인, 벨기에인들이 아프리카의 한 부족 한 부족을 절멸시켜가는 동안 독일에서는 그것을 본뜬 ‘레벤스라움(생활공간)’이라는 개념이 싹텄다. 내 살 곳을 만들려면, 내 살 곳을 늘려 남을 이기려면 남의 살 곳을 빼앗아야 하고, 열등한 야수들은 죽이거나 노예로 만들어버린다는 개념. 그것이 나치의 홀로코스트와 동유럽 점령의 기본 발상이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저자는 모래바람 날리는 북아프리카의 사막길과 유럽 옛 식민지 점령군의 잔혹하기 짝이 없는 만행들을 교차시키며 유럽 식민주의와 인종 대학살의 고리들을 파헤친다. ‘폭격의 역사’ 만큼이나 우울하고, 끔찍한, 그렇지만 대면해야 할 진실. 정복하기는커녕 남의 식민지가 되었던 나라에서 남들의 악행을 곱씹어봐야 뭐하나 할 수도 있지만, 바로 그런 ‘우리’를 향해 밖에서 안으로 들어온 박노자라는 사람이 질문을 던진다. “과연 과거인가?” 


“피해자도 가해자도 ‘영원한 현재가 돼버린 과거’의 외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 식민지 전쟁은 이제 ‘영광스러운 문명화 작업’이나 ‘열등 인종의 제압’이 아닌 ‘더러운 전쟁’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타인종, 타문화를 ‘야수’로 보는 의식이 완전히 없어지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추천의 글) 


그리고 박노자는 미국의 이라크 공격 등을 거론하면서 인종주의적 학살의 참극을 경고한다. 그러니 어쩌나. 우리에게도 ‘가해자’라는 꼬리표가 터럭 한끝이라도 붙을 수밖에 없는 것을. 


유럽이라면 사족을 못쓰는(이런 표현이 좀 심하다면 ‘유럽을 애호하는’으로 바꿔줄 수도 있다) 사람들이 한둘인가. 유럽에 가서 멋들어진 궁전에 조각상들 보고 좋아라 하는 한국인들이 거의 대부분 아니던가. 올림픽대교 가운데 첨탑위의 흉물스런 조각상을 보면, 그것을 올려놓느라 헬기를 탔다가 추락해 숨진 조종사 2명의 목숨 값 같아 마음이 편치 않다. 기본적으로 우리는 유럽 그 나라들 ‘낭만과 문화’를 수십만 수백만 명의 목숨 값으로 환산해 보는 데에 익숙지 않다. 우리 뿐 아니라 누구든 그럴 것이다. 

‘유럽 문명’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 사하라를 종단할 필요는 없지만, 생각도 안 해보고 있다가 남의 통렬한 비판을 들으면 “너무 심하게 말하지 마” 하면서 반사적으로 방어하게 되기 십상이다. 그런 방어벽을 깨야한다는 것을 책은 줄기차게 일깨워준다.


여행을 하다 보면, 특히 내전을 치렀던 지역이나 학살이 자행된 독재국가 같은 곳을 지나가게 되면 공기가 너무 무겁거나 핏빛이어서 얼굴을 돌리고 싶을 때가 있다. 서울 바닥에서 나고 자란 풍요의 세대, 나같은 사람에게 그런 곳으로의 여행은 사실 회피하고 싶은 진실일 뿐이다. 나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와, 역사의 끔찍한 부스러기들과 대면할 용기가 없는 사람이다. 두껍지 않은 이 책자에 나오는 잔혹한 사실들을 읽는 것만도 마음 불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를 직시해야 한다는 것, 마음 불편함 쯤은 과감히 누르고 들여다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메시지다. 




사하라는 여느 때와 다름없다. 강한 소독약 냄새, 기름칠을 하지 않아 끼익끼익 소리나는 문의 경첩, 반쯤 찢어진 블라인드, 다리 하나가 너무 짧아 흔들거리는 테이블, 그리고 테이블 표면과 베개와 세면기 위에 얇게 덮여 있는 모래가 너무나도 낯이 익다.

...하얀 기둥과 현관, 하얀 뾰족탑과 갓돌은 외벽이 불그스레한 갈색 진흙인 도심의 건물들에 생기를 불어넣고 있다. ‘블레드 에 수단’, 즉 흑인들의 나라라는 말을 따라 수단 양식, 곧 흑인 양식이라 불린다. 사실 이것은 1900년에 열린 파리 대박람회를 위해 프랑스인들이 창조한 상상 속의 양식인데, 그 뒤 이곳 사하라에 이식되었다. 현대식 건물들은 국제적 양식의 회색 콘크리트이다. (34~35쪽)


1887년 스코틀랜드의 외과의 던롭은 어린 아들의 자전거에 공기 고무 튜브를 장착한다는 착상을 떠올렸다. 이 자전거 타이어는 1888년에 특허 출원되었다. 그후 몇 년 동안 고무 수요가 증가하였다. 바로 이것이 콩고 체제의 야만화가 확대된 이유였다.


벨기에 국왕 레오폴트 2세의 대리인들은 대가를 조금도 지불하지 않고 원주민들로부터 노동력과 고무와 상아를 징발하였다. 거부하면 마을이 불타고 아이들이 살해되었으며 손이 잘렸다. 

이런 방식으로 처음에는 이윤이 극적으로 증가되었다. 이윤은 무엇보다도 브뤼셀을 지금도 꼴사납게 만들고 있는 셍캉트네르 아케이드, 라에켄 궁, 아르덴 성 같은 흉측한 몇몇 기념물을 건립하는데 사용되었다. 오늘날 그 누구도 이 기념물들이 얼마나 많은 손의 절단을 초래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60쪽)


사막에는 녹슬게 할 습기가 없으므로 수많은 폐차들이 그곳에 영원히 서 있다. 사자 모래 언덕은 차량의 진정한 공동묘지다. 보통 세단으로 사막을 건너려고 하는 것은 일종의 스포츠이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는 종종 여기서 끝난다. 


바람과 모래는 곧 모든 페인트를 벗겨내고, 이리저리 움직이는 모래 언덕이 예전에 죽은 낙타의 뼈들을 묻듯이 차의 뼈대를 묻지 않으면, 종국에는 금속이 마모되고 말 것이다. (153쪽)


1904년 남서 아프리카에서 독일인들은 미국인 영국인 및 기타 유럽인들이 19세기 내내 발휘해왔던 기술, ‘열등문화’ 인종의 절멸을 재촉하는 기술을 습득했음을 보여주었다. 북아메리카의 사례를 쫓아 헤레로인(남서 아프리카인)을 보호구역으로 쫓아냈고, 그들의 목초지는 독일인 이주민들과 식민회사가 접수했다. 헤레로족이 저항하자 아돌프 레브레흐트 폰 트로타 장군은 1904년10월에 헤레로인들을 절멸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독일 국경 내에서 발견되는 모든 헤레로족은 무장 여부에 관계없이 사살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헤레로족은 폭력 때문에 죽은 게 아니었다. 독일인들은 그들을 사막으로 몰아내고 국경을 봉쇄했을 뿐이었다.


...우기가 시작되자 독일 경비병들은 마른 웅덩이 주위에 쓰러져 있는 해골들을 발견했다. 이 웅덩이는 깊이가 7~15미터에 이르렀고, 헤레로족이 부질없이 물을 찾으려고 판 것이었다. 인종 전체, 약 8만명의 인간들이 사막에서 죽었다. 겨우 몇천 명만 남아서 독일 강제노동수용소에서 중노동형에 처해졌다. 그리하여 1896년 쿠바의 스페인 사람들이 고안하고, 미국인들이 영어화하고, 보어 전쟁 동안 영국인들이 다시 사용한 ‘강제 노동수용소’라는 말이 독일 언어와 정치에 들어오게 되었다. (230~2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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