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

'독재자들 재산환수' 힘겨운 싸움

딸기21 2010. 6. 9. 0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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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테일러는 라이베리아 출신 군벌로, 다이아몬드 광산을 장악한 뒤 원광석과 목재 등을 팔아 돈을 불렸다. 그걸로 다시 무기를 사서 내전을 일으켜 전국을 장악한 뒤 1997년 대통령이 됐다. 이웃한 시에라리온에까지 무기를 들여보내고 광산지대 무장세력들을 부추겨, 서아프리카를 세상에서 가장 참혹한 전쟁터로 만들었다. 2003년 영국군 등 다국적 지원군이 들어가 내전을 끝내고 무장해제를 시킨 뒤에 테일러는 쫓겨났다.
체포된 테일러는 네덜란드 헤이그의 감옥에 수감된 채 유엔 산하 시에라리온특별재판소에서 재판을 받고 있다. 교도소 경비 등을 포함, 재판비용으로만 다달이 10만 달러(약 1억2000만원) 이상이 들어간다. 이 돈은 대부분 미국이 내고 있다. 라이베리아는 내전으로 초토화된데다 국가재정이 거의 무너져 재판비용조차 감당하기 힘든 형편이다. 라이베리아 정부와 미국, 유엔은 테일러가 집권 시절 해외로 빼돌린 재산을 찾으려고 애쓰고 있으나 아직 큰 성과가 없다.


“테일러의 재산을 찾아라” 7년의 싸움

뉴욕타임스는 며칠 전 테일러의 재산을 찾기 위해 4대륙을 뒤지고 있는 라이베리아 정부와 유엔의 수색전에 대한 기사를 실었다. 테일러 재산찾기는 1979년 이란 파흘라비(팔레비) 왕조가 무너진 뒤 샤(왕)가 빼돌린 재산을 찾기 위한 소동이 벌어진 이래로, 최대의 ‘은닉자산 수색작전’이 되고 있다고 신문은 전했다.
테일러는 젊은 시절 미국에서 범죄를 저질러 수감된 뒤 탈옥을 해 리비아로 도망쳤다. 거기서도 말썽을 일으켜 무아마르 카다피 국가원수의 미움을 샀으나 고향으로 돌아가 군대를 키웠다. 내전 시기 ‘적들을 겁주기 위해’ 인육을 먹었을 정도로 야만적이었고, 잔인하기 짝이 없었다고 한다. 2000~2003년 라이베리아의 대통령 봉급은 공식적으로 월 2만4000달러였으나 목재회사, 국영전화회사, 다이아몬드광산 등을 장악해 거액을 빼돌렸다. 국민 세금 200만달러를 버젓이 수도 먼로비아의 자기 은행 계좌에 집어넣었을 정도로 후안무치했다.

네덜란드 헤이그의 시에라리온특별재판소 법정에 출두한 라이베리아 전대통령 찰스 테일러. /ANP


그가 외국에 숨겨놓은 돈이 정확히 얼마인지는 알 수 없다. 최소한 2400만 달러 이상이 미국 뉴욕 시티뱅크 지점을 거쳐 테일러의 계좌에 입금됐던 사실은 기록을 통해 파악됐다. 그 돈은 대부분 대만 정부가 라이베리아 어린이 에이즈 치료를 돕기 위해 보낸 원조금이었다. 돈의 행방은 오리무중이다.
라이베리아 정부는 자산추적 전문가인 미국 변호사 토머스 크릴과 로펌 3곳을 고용해 테일러 돈 찾기에 나섰으나, 지금까지 7년 동안 라이베리아 내에서 테일러 친척들이 갖고 있던 800만달러를 압류하는 데에 그쳤다. 테일러는 얼마전 헤이그의 교도소에 앉아서 “지구상에서 나 찰스 테일러가 돈을 숨겨놓은 계좌가 있다는 사람이 있다면 데려와보라”며 큰소리를 쳤다.

수색단이 애를 먹는 것은 테일러와 연결된 자산들이 미국, 스위스, 홍콩, 라이베리아 등 4개 대륙에 걸쳐 복잡하게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크릴은 “테일러의 돈이 무기거래상들에게 들어갔다가 여러 차례 세탁을 거쳐 어디론가 이동한 것 같다”고 말했다. 스티븐 랩 미 전범전담 대사는 “숨겨놓은 재산을 찾으려면 앞으로도 몇 년은 걸릴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 사이 라이베리아는 재정부족으로 애써 출범한 민주정부가 흔들릴 지경이 되고 있다. 2006년 민주선거로 집권한 엘렌 존슨-설리프 대통령은 국제사회의 도움을 받아 군대를 재건하고 인프라 복구에 나서고 있으나, 모든 산업이 무너져 재정수입이 거의 없다. 1인당 연간 국내총생산(GDP)은 500달러로 세계 최하위고, 실업률이 85%다. 정부는 테일러 재산찾기에 목을 매고 있다.


마르코스, 수하르토 일가는 건재

지난달 필리핀 대선에서 고(故) 코라손 아키노 전대통령의 아들 노이노이 아키노가 승리하면서 세계의 시선을 받았다. 그러나 그와 함께 총선·지방선거에서 당선된 이들 중에는 낯익은 이름들이 더 들어있었다. 독재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의 부인 이멜다와 아들 봉봉 마르코스, 딸 이미 마르코스도 버젓이 당선된 것이다. 코라손이 1986년 집권한 뒤 좋은정부위원회(PCGG)라는 기구를 만들어 마르코스 일가의 자산 추적에 나섰지만 아직 성과는 미미하다. 마르코스는 1969년부터 스위스 등지에 50개 이상의 이름뿐인 ‘재단’들을 만들어 재산을 빼돌렸다.

지난달 10일 필리핀 대선, 총선 때 북부 일로코스주 바탁의 투표소에서 투표하는 이멜다 마르코스.
부인 이멜다를 비롯, 독재자 마르코스의 일가족은 민주화가 이뤄진지 20여년이 지난 지금도
필리핀의 유력가문으로 군림하고 있다. 바탁/AP연합뉴스


마르코스가 축출된 뒤 민선정부들이 계속 추적을 했음에도, 2003년까지 6억8000만달러의 횡령재산을 환수하는 데에 그쳤다. 86년 마르코스가 하와이로 망명했을 때 독재정권에 피해를 입은 필리핀인 1만명은 하와이 법원에 불법 처형·고문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다. 법원은 원고들에게 총 19억7000만달러를 주라는 판결을 내렸지만 한푼도 지급되지 않았다. 이 소송을 주도했던 가톨릭 신부 카를리토 가스파르는 지난달 PCGG를 향해 “마르코스 일가와 타협하지 말고 배상금을 받아내라”고 촉구했다.
루벤 카란사 전 PCGG 위원장도 노이노이 아키노 당선자에게 “마르코스 집안 자산을 당장 몰수하라”고 요구했다. 그는 “마르코스의 아들딸은 아버지의 재산에 기대어 정치를 하면서 지금도 독재정권을 공공연히 옹호하고 있다”며 특히 아들 봉봉 마르코스는 수시로 유럽을 들락거리면서 자산 이전과 아버지 재산 세탁을 계속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마르코스의 자식들이 유럽의 조세피난처 리히텐슈타인과 스위스에 만들어놓은 ‘재단’들에서 돈을 받아먹지 못하도록 정부가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말했다.

마르코스보다 더 많은 돈을 숨겨놓고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것은 인도네시아의 독재자 수하르토 일가다. 수하르토는 99년까지 32년간 이 나라를 쥐고흔들면서 하도 많은 돈을 챙겨, “인도네시아는 수하르토 주식회사”라는 소리를 들었을 정도다. 국영항공회사, 에너지회사를 비롯해 거의 모든 대형 국영기업이 수하르토의 일가친척들 손에 들어갔다. 막내아들 토미 수하르토는 ‘티모르 푸트라 나시오날’이라는 회사를 만들어 국민차 사업을 했는데, 한국차를 사들여 이름만 바꿔달아 판매해 비난을 받았다. 이 회사는 97~98년 금융위기 때 정부의 구제금융을 받았지만 아직도 돈을 갚지 않았다.
지난달 인도네시아 재무부는 토미가 갚지 않은 돈을 받아내기 위해 수하르토 가족 자산 2조3700억 루피아(약 3160억원)를 동결시켰다. 하지만 이 정도는 새발의 피다. 수하르토가 축출된 직후 인도네시아 정부가 조사를 했더니 스위스와 오스트리아 등 세계 11개국에 계좌가 널려있었다. 수하르토가 스위스로 빼돌린 돈만 90억달러였다. 시사주간 타임은 정부관리들을 인용, 수하르토 일가가 운영한 기업들의 탈루 세액만 따져도 최소 25억달러에서 많게는 100억달러가 될 것이라고 추산한 바 있다.
그러나 정치권의 온갖 협상과 야합 등으로 인해 수하르토 일가는 재산을 거의 빼앗기지 않았다. 수하르토는 건강 문제 등을 들며 사법처리도 교묘히 피해나갔고, 물러난 뒤에도 자카르타의 저택에서 ‘천수’를 누리다가 2008년 사망했다. 과거사 청산이 이뤄지지 않은 탓에 여섯 자식들은 지금도 떵떵거리며 살고 있다.

지난 1월 지진 뒤 아이티 수도 포르토프랭스에서 주민들이 구호식량을 받기 위해 앞다퉈 손을 내밀고 있다.
뒤발리에 독재자 가문은 빼돌린 재산으로 지금도 배불리 사는 반면, 아이티인들은 가난에 시달린다.
작은 사진은 '베이비 독'으로 불렸던 독재자 장-클로드 뒤발리에. 포르토프랭스/AFP연합뉴스


부정축재 돕는 서방국가들

99년 나이지리아의 독재자 사니 아바차 장군이 죽은 뒤 세계 전역에 인터넷 스팸메일이 돌았다. ‘사기 스팸메일’의 원조로 분류되는 이 메일의 내용은 “나는 아바차의 아들인데 아버지가 스위스 은행에 둔 돈을 찾아야 하니 이름을 빌려달라, 개인정보를 알려주면 나중에 돈을 떼어주겠다”라는 것이었다.
아바차는 죽기 전 나이지리아의 석유수입 중 어마어마한 부분을 횡령해 외국에 숨겨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스위스 은행에 맡겨둔 돈만 해도 최소한 50억달러는 넘을것으로 전문가들은 본다. 하지만 지금까지 11년이 지나도록 나이지리아 정부가 찾아낸 돈은 7억달러에 불과하다.

옛 자이르(현 콩고민주공화국)의 장기집권 독재자 모부투 세세 세코는 97년까지 집권하면서 역시 엄청나게 부정축재를 했다. 하지만 그가 죽은 뒤에도 아들이 장관을 계속 하고 있던 탓에 재산추적은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정권이 두번이나 바뀌었지만 자원부국인 이 나라의 국민들은 지금도 가난하고, 재정은 몹시 취약하다.
이른바 선진국들이 독재자 자산을 끼고 앉아 어부지리를 누린다는 지적도 많다. 영국은 스위스를 향해 눈을 흘기면서도, 자국령 저지 섬, 맨 섬 등이 조세피난처로 악용되는 것에는 입을 다물고 있다. 사니 아바차의 경우 영국령 저지에 대규모 차명계좌를 만들어놨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이티의 옛 독재자 장-클로드 뒤발리에는 아버지 프랑수아 뒤발리에(일명 ‘파파독’)의 뒤를 이어 집권, ‘베이비독’이라  불리며 배를 채웠다. 뒤발리에 가문은 86년 민중봉기로 축출될 때까지 ‘브루이 재단’이라는 기구를 통해 리히텐슈타인, 파나마 등지로 돈을 빼돌렸다. 지난해 11월 스위스 루잔 법원은 뒤발리에의 동결자산 700만스위스프랑(약 74억원)을 풀어주라는 판결을 했다.
아이티 정부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법원은 독재자 편을 들었다. 스위스 은행들이 지난해 4월 시작된 유럽의 ‘조세피난처 규제’ 조치에 따라 투명성을 강화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까지 독재자들의 계좌를 낱낱이 보여주지는 않는다. 유엔과 세계은행이 ‘횡령자산복구계획(STAR)’이라는 것을 만들어 제3세계 부정축재자들 돈을 찾아내려 애쓰고 있으나 조세피난처 국가들의 협력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지적이 많다.


구정은 기자 ttalgi21@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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