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잠보! 아프리카

무지개와 뱀파이어의 땅- 탄자니아, 잠비아, 보츠와나

딸기21 2010. 2. 26. 11:31
728x90

▶ 아프리카에서 부족과 국가 간 분리에 가장 근접해 있는 나라는 탄자니아다. 탄자니아에는 120개의 종족 집단이 살고 있고 이들 집단은 때로는 상호이해가 불가능한 문화를 가지고 잇지만, 독립 후 수십 년 동안 이 나라는 집단적 유혈 사태를 겪은 일이 거의 없다. 
초대 대통령 줄리어스 니에레레의 경제 정책은 엉망이었다. 61년 독립 당시 대학생이라곤 16명밖에 없었던 나라에서 그는 국가계획경제를 수립하기 위해 애썼다. 니에레레는 기업을 국유화하고 외국 기업을 수용(收用)했으며 인도와 아랍 상인들의 가게를 문 닫게 하고 이곳을 관료들로 채웠다. 머지않아 탄자니아에서는 제대로 불이 붙는 성냥을 사기도 힘들어졌다.
니에레레는 또한 농촌 인구의 2/3를 집단농장으로 보냈다. 다행히 모택동과 달리 니에레레는 농부들이 집단농장에 있도록 총을 들이댈 생각은 없었다. 그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농장을 뛰쳐나와 집으로 돌아가 자신들의 밭을 돌보았다. 에티오피아 농부들에게는 이런 행운이 없었다.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 Mengistu Haile Mariam 은 농민들을 강제로 집단농장으로 보냈고 그 결과 100만 명이 굶어 죽었다.

▶ 하지만 니에레레는 종족 문제에 대해서는 비상한 기지를 발휘했다. 그는 종족 문제가 나라를 사분오열시킬 수 있다는 점을 간파하고 있었다. 그는 스와힐리어를 강제로 공용어로 정해 국민 모두가 이 언어로 소통하도록 했다. 정치에서 종족 간 분열을 가져오는 이야기들은 금지시켰다. 니에레레가 부족주의를 금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정권이 철저히 비민주적이었기 때문이다. 탄자니아는 1995년에 다당제 민주주의 국가가 되었고 부족간 관계도 더 원만해졌다.
일부 사람들은 아프리카에서 다당제 정치는 필연적으로 종족 정치로 변모한다고 주장한다. 1986년 이래 우간다 대통령 무세베니는 이런 이유를 들어 사실상 정당을 불법화했다. 그런데 2003년에 그는 이런 금지 조치를 해제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 인접국인 잠비아와 보츠와나는 문화적으로 동일하지는 않지만 사촌형제 간이다. 1960년대에 독립 당시 잠비아는 아프리카에서 두 번째로 부유한 나라였고 보츠와나는 한 영국 식민관리가 표현했듯이, ‘쓸모없는 땅덩어리’에 불과했다.
잠비아의 초대 대통령 케네스 카운다는 일당체제의 사회주의 국가를 세우고 구리 광산에서부터 미용실과 세탁소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국유화했다. 구리 광산을 고갈되지 않는 재정 수입원이라고 믿었고 수천 명의 불필요한 인력을 배치했다. 1974년 구리 가격이 하락하자 정부는 더 이상 비용 지출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부 재정 부족분은 외국 원조로 충당되었다. 카운다 대통령이 점점 더 어리석은 경제 정책을 추진할수록 원조의 비중은 높아졌고, 90년대 초반 원조 비율은 GDP의 11%까지 이르렀다. 80년대 IMF는 시장경제 개혁을 조건으로 원조를 줬지만 잠비아 정부는 개혁에 열의가 없었고 번복을 일삼았다. 그래도 잠비아 재정은 해외 원조로 채워졌다.
90년 원조국들은 그를 압박하여 야당을 허용하도록 했고 이듬해에는 선거가 실시됐다. 카운다는 패배했고 전직 노조 지도자 프레데릭 치루바가 민주주의 확대와 경제개혁을 약속하며 당선되었다. 해외 원조는 다시 늘어났다. 치루바는 외국 원조에 힘임어 초기에는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원조의 급증은 치루바가 필수적인 개혁을 지연하거나 회피하도록 만들었다. 더 나쁜 것은 그가 거의 10년 동안 구리 광산을 민영화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윌리엄 이스털리에 의하면 만일 해외원조가 예상했던 것처럼 61~94년간 경제 성장을 촉진시켰더라면 잠비아 국민의 평균 소득은 2만 달러를 초과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평균 소득은 겨우 그 1/6 미만에 머물러 있다.

▶ 보츠와나는 66년 독립 당시 세계 최빈국 중 하나였다. 그러나 독립하고 얼마 안 되어 사막 아래에서 다이아몬드가 발견됐다. 보츠와나 정부는 횡재를 낭비하지 않았다. 다이아몬드로 벌어들인 달러는 사회 기반시설과 교육, 보건에 투입되었다. 기업 활동에 대한 제약도 없었고, 외국인 투자는 환영을 받았다. 남아공 사람들이 와서 오카방고 삼각주에 사파리용 로지를 세웠다. 원조 사업들도 투명하게 추진되었으며 공여국들은 언제든지 방문해 돈이 어떻게 활용되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지난 35년간 보츠와나 경제는 어느 국가보다도 빠르게 성장했다. 그러나 각료들은 저택이나 헬기를 챙기지 않았고, 대통령조차도 직접 장을 보는 것으로 알려졌다. 99년에는 외환 통제가 폐지되었고 재정은 대부분 흑자를 유지했다. 1인당 GDP는 3000달러를 넘어섰다.

▶ 원조국은 또한 개별 국가에 대한 원조는 줄이는 대신 백신처럼 모든 가난한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는 기술 개발에 더 많은 자금을 지원해야 한다. 이런 접근 방식은 최근 인기를 얻고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부유한 나라들이 가난한 나라 상품에 시장을 개방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선진국 보호주의 때문에 빈곤국은 매년 1,000억 달러, 즉 매년 원조로 받는 금액의 2배를 피해보고 있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