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잠보! 아프리카

무지개와 뱀파이어의 땅 -내전과 자원, 나이지리아

딸기21 2010. 2. 26. 11:27
728x90

▶ 앙골라, 차드, 콩고 브라자빌, 수단 내전은 모두 석유 자원을 둘러싼 것이었다. 반군들은 시에라리온에서 다이아몬드 광산을 지배하기 위해 싸웠고, 서부 사하라에서는 인산염을, 라이베리아계서는 철광석, 목재, 다이아몬드 그리고 마약통제권을 놓고 싸웠다.

▶ 아마도 카빌라가 저지른 가장 큰 실수는 르완다 후원자에 대한 배신이었을 것이다. 집권한 지 1년밖에 안 되어 카빌라는 공동 적이던 대학살의 주인공 후투 반군과 손을 잡았다. 화가 난 르완다 정부는 자신이 내세웠던 인물을 전복시키기로 결정하고 똬리를 튼 코브라처럼 빠른 속도로 대응했다. 그들은 정글 넘어 2000km나 되는 지역에 구형 소련제 수송기로 군대를 투입했고 킨샤사에서 멀지 않은 키토나와 마타디 지역에 기지를 세웠다. 수일 내로 르완다군은 킨샤사에 전력을 공급하는 수력 발전 댐을 점령했고 수도 자체를 공격하겠다고 위협을 가했다.
마지막 순간에 동맹군이 도착하지 않았더라면 킨샤사는 적의 수중에 넘어갔을 것이다. 전폭기와 비교적 잘 훈련된 병력을 갖춘 짐바브웨와 앙골라 그리고 나미비아 연협군이 도착해 반군과 르완다군을 재빨리 격퇴시키고 도시를 확보한 것이다.
전쟁은 1999년에 교착 상태에 빠졌다. 르완다와 우간다 군대는 민주콩고 동부 지역에서 다이아몬드와 코발트를 캐고, 나무를 베며, 원숭이를 잡아 밀림고기를 만들고, 상아를 채집하고, 가져갈 수 있는 것은 모두 가로챘다. 르완다에서는 다이아몬드가 생산되지 않았지만 키갈리에 다이아몬드 시장이 생겨나 번창했다. 카빌라의 동맹국인 짐바브웨와 앙골라 군사령관은 귀금속 광산 채굴권을 얻어 냈고, 앙골라는 민주콩고 정부와 석유 합작사업을 벌였다.
짐바브웨 군대는 소도시 음부지마이 Mbuji Mayi 남부에 있는 약 10억 달러로 추정되는 다이아몬드 광산을 지키고 있었는데 이 광산 채굴권은 2000년 짐바브웨 집권 여당이 지분을 가진 회사에 양도되었다. 민주콩고에서 지출되는 짐바브웨 군 경비는 국민 세금으로 충당되었지만 참전에 따른 수익의 거의 대부분은 무가베 대통령의 추종세력에게 들어갔다.

▶ 앙골라 내전이 이렇게 오래 지속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에 관한 단서는 포르투갈의 또 다른 식민지였던 모잠비크에서 찾을 수있다. 잉골라와 마찬가지로 모잠비크도 피비린내 나는 반(反)식민지 전쟁을 겪었고 포르투갈 사람들이 떠나자 앙골라보다 훨씬 참혹한 내전이 일어났다.
그렇다면 무엇이 다른 것일까? 흑인 정부가 집권한 지역 남아공이 모잠비크 내전 당사자에게 화해 압력을 가한 것이 물론 도움이 되었다. 또한 모잠비크 정치지도자들이 앙골라의 경우보다 더 합리적이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차이는 모잠비크에는 훔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모잠비크의 경우 1992년 내전이 종식되자 정부는 사회주의를 청산하고 투자자들을 환영했다. 이 결과 90년대 말에는 급속한 성장을 이루었다.

▶ 냉정하고도 분명한 진실은 세계의 강대국들은 더 이상 식민지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서방 국가들은 아프리카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단 1명의 자국 병사라도 희생시키랴 하지 않는다. 따라서 아프리카는 이제 자신들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얹다. 그러나 그 어떤 아프리카 국가도 작은 인근 국가를 제외하고, 다른 아프리카 국가에 평화를 강요할 만큼 강력한 힘을 보유하고 있지 못하다.

▶ 갈등이 발생하는 원인은 부족 간 감정 그 자체가 아니라 정치화에 있었다. 대부분의 아프리카 종족 갈등에는 식민 지배당국이 부족에 대한 충성심을 배후 조종했다는 음모가 숨어 있다. 오늘날 민족분쟁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해묵은 과거의 감정 때문이 아니라 현대 정치 때문이다.

▶ 1973년 후투족 출신 주베날 하비아리마나가 권력을 장악하고 경찰국가를 세웠다. 하비아리마나는 공직 사회에서 투치족을 배제시키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가리지 않았다. 투치족은 당연히 하비아리마나의 독재 정치를 벗어나고 싶어 했고 1990년까지 약 60~70만 명의 투치족이 르완다에서 도망쳤다.
후투족 정부는 94년 4월 6일부터 투치족 말살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6주 동안 약80만 명이 살해되었다. 이 수치는 르완다 인구의 1/10로 나치 수용소에서 죽은 사람의 약 5배에 달한다. 투치 반군 르완다애국전선이 전쟁에 승리함으로써 비로소 학살은 끝났다. 반군이 의외로 쉽게 진군할 수 있었던 것은 르완다 정부군이 시민 살상에 정신이 팔려 있었기 때문이다. 7월 르완다애국전선은 키갈리를 점령했다. 학살자들은 자이르로 도주했으며 약 100 만 명의 후투족이 보복이 두려워 이들과 함께 떠났다.
르완다는 투치족의 실력자 폴 카가메 치하에서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았다. 외국원조로 카가메 정부는 국가를 재건했고 평균소득수준은 대학살 이전으로 회복되었다. 그러나 심리적 상처는 아물지 않고 있다.

▶ 종족 유대감은 나이지리아의 거대한 악인 부패를 정당화하는 데 이용되고 있다. 석유가 발견된 이후 정치란 주로 석유 달러를 쟁탈하는 것으로 변질되었다. 나이지리아 사람 대부분이 부패를 반대한다고 말하지만 부패한 정치인이 자신이 속한 부족 사람이라면 쉽게 그를 용서하고 심지어 격려하기까지 한다.
나이지리아의 종족 분쟁은 식민지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국경을 획정한 것은 영국인들이었고 이들은 1914년에 뒤섞인 여러 종족과 종교를 한 덩어리로 만들어버렸다. 영국은 선교사들이 북부 회교도지역에서 선교활동을 자제하도록 했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학교를 모두 남부에 세웠다. 1950년이 되자 남부에는 대학 졸업생이 수천 명에 달했지만 북부에는 단 1명뿐이었다. 계산을 할줄 알고 글을 알아야 하는 공직은 모두 남부인이 차지하게 된 것이다.
독립이 가까워오자 북부 지도자들은 위협을 느끼고 ‘북부화’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그 후 나이지리아는 거의 북부 회교도 군부 실력자들에 의해 통치되어 왔다. 남부 사람들은 차별에 분개했다. 주로 이보족 출신으로 구성된 장교들이 66년 쿠데타를 모의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남동부 사람들이 유전지역을 분리하려고 시도하자 사태가 최고조에 달했다. 정부군은 무자비하게 반란을 진압했다. 완전하게 진압되기까지 3년이 걸렸고 10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아바차가 죽은 후 나이지리아는 비교적 공정한 선거를 치렀고, 전직 장군 올루세군 오바산조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는 요루바족으로 기독교로 개종했지만 북부 회교도 지도자들과 친분관계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종족집단을 위해 권력을 남용하지는 않았다. 연방 기금을 여러 주에 분배하려 노력했고 동시에 작은 지역으로 계속 분열해 나가는 주에는 인센티브를 줄였다. 그러나 종족 간 유혈 사태는 민주주의가 회복된 이후 더 잦아졌다. 아마도 더 이상 혹독하게 진압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오고니족 지도자로 1995년 군사 정부에 의해 교수형에 처해진 켄 사로 위와 Ken Saro Wiwa는 다음과 같이 경고한 적이 있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나이지리아라 불리는 니라가 존재하고 그것은 변함없는 진실이라고 믿는 것은 섣부른 행동이다. 나이지리아와 같은 시기에 세워진 소비에트연방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으며 유고슬라비아도 흔적을 감추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우 조심해야한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