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 낸시 케리건 습격사건

동양 출신 피겨스케이트 선수로 은반위의 여왕에 처음 등극한 사람은 미국의 크리스티 야마구치다. 

지난해 “김연아의 팬”이라 밝혀 화제가 되기도 했던 야마구치는 캘리포니아의 일본계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1986년 미국 주니어선수권대회 페어부문에서 우승하면서 이름을 알렸고 88년 세계 주니어선수권대회, 91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하며 미국 피겨계를 이끌었다. 92년 프랑스 알베르빌 동계올림픽에서 동양계로서는 처음으로 피겨스케이팅 금메달을 따냈다.
 

당시 그에게 밀려 은메달을 딴 선수는 일본 피겨의 희망이던 이토 미도리였다. 일본인들은 자기네 핏줄들의 피겨전쟁을 흥미롭게 지켜봤지만 야마구치는 끝까지 “나는 미국인일 뿐”이라고 말해 일본팬들이 오히려 등을 돌렸다고 한다.

미국의 토냐 하딩도 알베르빌 올림픽에 출전했던 재능있는 선수였지만 번번이 야마구치에게 밀렸다. 92년 올림픽과 뒤이은 세계선수권대회를 끝으로 야마구치가 프로로 전향하면서 하딩에게도 빛 볼 날이 오는 듯했다. 하지만 미국 피겨계에서는 새로운 유망주 낸시 케리건이 급부상해 하딩을 위협하고 있었다.

사건이 일어난 것은 94년 1월 6일이었다. 노르웨이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을 앞두고 케리건이 연습을 하고 있던 곳에 한 남자가 뛰어들어 케리건의 무릎을 몽둥이로 내리쳤다. 케리건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모습이 일제히 방송을 탔다. 

놀랍게도 범인은 하딩의 전 남편이었다. 라이벌인 케리건을 무너뜨리기 위한 청부폭력이었던 것이다. 결국 케리건은 올림픽에 나오지 못했다. 하딩은 출전했지만 성적은 초라했고, 금메달은 우크라이나의 옥사나 바이울에게 돌아갔다.

국제스케이트연맹에서 제명당한 하딩은 갑자기 복싱 선수로 변신, 빌 클린턴 전 미국대통령 스캔들에 연루된 폴라 존스와 대결을 해 눈길을 끌었다. 프로복싱선수로 돈을 벌다가 2004년에는 아이스하키리그(NHL) 인디애나폴리스 팀에 입단했으나 호기심 이상의 관심은 받지 못했다. 

게다가 전 남편과의 섹스비디오가 인터넷에 유출됐고, 남자친구를 폭행해 체포되기까지 했다. 피겨 사상 최악의 폭력사건을 일으킨 하딩은 그렇게 나락으로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