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얘기 저런 얘기/공은 둥글대두

외인구단에 박수를 보낸다

딸기21 2003. 6. 17.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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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시즌 스페인 프리메라리가가 37라운드까지 모두 마쳤으니 이제 팀마다 딱 한 경기씩 남았다. 1위를 달리고 있는 것은 '무적함대' 레알마드리드, 그리고 2위는 레알 소시에다드다.
레알 소시에다드라는 팀은 여간한 축구팬이 아니고서는 잘 알지 못할 것이다. 프리메라 리가가 쎄다고는 하지만 이 팀은 그 엄청난 리그의 '그저 그런 팀들' 중의 하나였을 뿐이다. 적어도 이번 시즌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37라운드, 소시에다드와 셀타비고의 경기가 셀타비고 홈에서 열렸다. TV 카메라는 계속해서 원정 온 소시에다드 응원팀의 모습을 비춘다. 자기네 팀 선수들의 동작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하면서 선수들 못잖게 긴장하고 있는 사람들. 클로즈업된 얼굴들은 너무나 진지하다. 축구에 목숨걸었나 싶을 정도로, 경기에 몰두해 있다.
이날 매치는 양팀 모두에게 대단히 중요한 경기였다. 셀타비고는 현재 리그 4위, 이 자리를 지켜야만 다음 시즌 '꿈의 리그'로 불리는 유럽 챔피언스리그에 출전할 수 있다. 소시에다드는? 그들에게 이 경기는 '생애 가장 중요한 경기'다. 대표 스트라이커 니하트의 표현처럼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경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경기 결과는 셀타비고의 승리. 소시에다드는 졌다. 가장 재미나다는 '펠레 스코어', 2대 3으로 패했다. 같은 시간 2위였던 레알마드리드는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를 무려 4대 1로 대파하고 1위로 올라섰다. 이번 시즌 거의 내내 1위 자리를 지켰던 소시에다드는 이 경기에서 진 탓에 2위로 내려앉았다. 마지막 경기에서 이긴다 하더라도 자력으로 우승할 가능성은 낮아졌다.
소시에다드에서 부동의 스트라이커로 시즌 내내 막강한 화력을 보여줬던 코바체비치가 전반 말미에 부상으로 빠진 공백이 컸다. 레이날드 드누에스 감독에게 사실상 '교체 카드'란 없었다. 러시아 출신의 호흘라프를 긴급 수혈하긴 했으나 다음 시즌 방출이 거의 확정된 그가 코바체비치의 몫을 대신해주지는 못했다. 스물 네 살 터키 청년 니하트가 두 골을 넣기는 했지만 시간은 이들의 편이 아니었다. 화면에는 계속해서 선수들의 플레이와 소시에다드 팬들의 얼굴이 오버랩됐다. 교체되어 나간 코바체비치는 정장으로 바꿔 입고 남은 경기를 구경했다. 팀이 이기는 것을 누구보다 보고싶어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경기에는 졌지만 이번 시즌 프리메라 리가의 '1등'은 누가 뭐래도 소시에다드다. 초호화군단 레알 마드리드가 우승한다 한들 의외다 여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번 시즌 내내 프리메라 리가 최고의 팀은 소시에다드였다. 그들의 돌풍이 무엇보다 빛났던 시즌이었다. 마드리드처럼 패싱 머신 같은 모습은 아니지만 이들의 패스웍은 나름대로 유기적이고, 선수들은 하나같이 열심히 뛴다. 이들을 이번 시즌 가장 빛나는 팀으로 만든 것은 거액 몸값을 자랑하는 스타도, 유명 감독도 아닌 '보통 선수들'의 열성적인 플레이였다.
소시에다드라는 팀은, 스페인 리그에서는 '외인구단'이라 해도 될만하다. 유럽 리그에서 톱 클래스에 들어가는 선수는 이 팀에 없다. 가장 유명한 선수라 해봤자 스페인 국가대표인 데 페드로 정도. 이번 시즌 프리메라 '최고의 투톱'으로 위력을 과시한 코바체비치는 세르비아 출신, 니하트는 터키 출신이다. 데 페드로와 함께 투톱을 받쳐주는 카르핀은 러시아에서 왔다. 골키퍼 베스터펠트는 제법 실력은 있지만, 네덜란드 국가대표팀에서 반데 사르에게 밀려 만년 벤치 신세다.

여러 말 할 필요 없이, 소시에다드는 '바스크의 팀'이다. 이 말 한마디면 스페인에서 이들이 차지하는 위치에 대한 모든 설명이 끝난다 해도 될 것이다. 바스크가 어디인가. 피카소의 그림으로 유명해진 '게르니카'의 아픔을 아직까지 간직하고 있는 곳, 불과 몇년 전까지만 해도 ETA를 비롯한 분리운동세력의 '과격테러'가 빈발했던 곳, 스페인에 대한 소속감보다는 바스크인의 기질을 높이 쳐주는 곳, 그만큼 마드리드 중앙정부에 대한 반발이 큰 곳이다. 그 곳의 축구팀이 바로 소시에다드다.

축구는 다른 어떤 스포츠보다도 정치적이라고들 한다. 특히 봉건시대 도시국가들의 연합으로 출발한 유럽 국가들에서 각 도시를 연고로 하는 축구팀들간의 경쟁이 정치투쟁 만큼이나 치열하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마드리드만 해도, 상류층 클럽 레알 마드리드와 '서민 축구팀'인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로 팬들이 나뉘어 있다. 그런가하면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의 유명한 '클래식 더비(엘 클라시코)'는 중앙 대 지방의 피튀기는 싸움판으로 유명하다. 이탈리아의 인터 밀란과 AC밀란은 파란색-빨간색 유니폼 빛깔대로 제각각 부유층과 서민층의 지지자들을 이끌고 있다. 잉글랜드의 맨체스터 시티는 '도시의 팀'인 반면 재벌 클럽으로 꼽히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실상은 '변두리 팀'으로 출발했다. 아르헨티나의 리베르 플라테(부유층)와 보카 후니오르스(서민층)의 '엘 클라시코 더비'도 서포터들의 대립적인 성격으로 유명하다.

왕실 공인을 받았다는 '아르마다' 레알 마드리드를 넘어 리그 우승을 꿈꾸었던 소시에다드. 스페인 선수가 이 팀에서 뛰려면 스페인 국적 외에 '바스크 국적'을 따로 받아야 한다고 하니, 이들의 고집과 소외감이 어느 정도인지 알겠다. 그나마 이들은 '개방적'인 편이고, 같은 바스크 연고팀인 애슬레틱 빌바오는 아예 외부 선수들은 받지 않고 바스크족으로만 팀을 구성한다. 어쨌든 다음 시즌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발렌시아를 볼 수 없게 된 대신, 소시에다드의 플레이를 지켜볼 수 있게 됐다. 코바체비치와 니하트는 외인구단 중에서도 외국인이고, 이들 플레이어의 개인사에 대해서는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이들을 비롯한 소시에다드 선수들, 어쩐지 그들의 '꿈'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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