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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보기’라는 애칭으로 유명한 보잉 747.
20세기 항공기의 대명사다. 미국 보잉사는 1960년대까지 민항기의 주류를 이루던 707을 대체할 초대형 항공기로 747을 디자인했다. 초창기 터보제트 엔진의 2배 출력을 낼 수 있는 고출력 터보팬 엔진이 개발돼 점보기가 탄생할 수 있었다고 한다.
설계될 때만 해도 보잉사에는 초대형 항공기를 조립할 수 있는 공장이 없었다. 보잉은 미국 내 50여개 도시를 놓고 입지를 고민한 끝에 워싱턴주 에버릿의 페인필드 미군기지 땅을 이용하기로 했다. 이곳에 66년 316헥타르의 공장을 만들고 조립에 들어갔다.
사운(社運)이 걸린 일이었던지라 윌리엄 앨런 당시 보잉 회장이 에버릿 공장 설립을 일일이 현장에서 지휘했다고 한다. 에버릿 공장은 당시 미국에 지어진 가장 커다란 건물이었으며, 747 모델이 늘면서 계속 확대됐다.
사운(社運)이 걸린 일이었던지라 윌리엄 앨런 당시 보잉 회장이 에버릿 공장 설립을 일일이 현장에서 지휘했다고 한다. 에버릿 공장은 당시 미국에 지어진 가장 커다란 건물이었으며, 747 모델이 늘면서 계속 확대됐다.
영국항공(BA)의 747-400 항공기
네 발 내리고 착륙 준비 하는 에어프랑스 점보기
파키스탄인터내셔널항공(PIA) 747 여객기
747은 1968년 9월 30일 일반에 첫 선을 보였고, 이듬해 400명을 태우고 첫 시험비행에 나섰다. 당시의 탑승인원 기록은 2007년 에어버스의 ‘수퍼점보기’ A380(최다 탑승인원 850명, 실제 탑승인원 485명)이 뜰 때까지 37년 동안 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747의 모의 대피실험에서 당시 연방항공청(FAA) 기준인 90초를 훨씬 웃도는 150초가 걸리고 일부 탑승자들이 다쳤다. 특히 2층 객실 탑승자들이 대피하기가 불편한 것으로 드러났다. 보잉은 당시 조종사의 이름을 따 ‘워델 왜건’이라 불리는 특수 대피 장치를 설치, FAA 심사를 통과했다.
민간 여객수송에 ‘데뷔’한 것은 1970년이었다. 팬암 항공사가 5억2500만 달러를 주고 747-100 모델 25대를 사들여 운항을 시작했다. 첫 비행을 앞두고 축성식(祝聖式)을 할 때에는 리처드 닉슨 당시 대통령 부인인 팻 닉슨도 참석했다.
1970년 첫 비행에 나선 보잉 747에 승무원실에 탑승한 당시 퍼스트레이디 팻 닉슨
팬암은 747의 첫 고객으로서 출시 2년 전에 이미 계약을 체결했기 때문에, 세부 디자인에는 팬암 측 요구가 많이 반영됐다. 양대 엔진 제작사였던 제너럴 일렉트릭(GE)과 프랫앤드휘트니(F&W)의 차세대 엔진 경쟁에서 F&W의 손을 들어준 것도 팬암이었다. 747은 보잉, 팬암, F&W 3사의 합작품이었던 셈이다.
747은 4개의 엔진에 2층의 객실로 이뤄져 있다. 2층은 퍼스트클래스 라운지로 쓰이는 것이 보편적이라고 한다. 퍼스트클래스 안 타봐서 모르겠지만...
그런데 당초 개발 때만 하더라도 보잉은 화물기로 ‘용도변경’하기 쉽도록 만드는 데에 주안점을 둔 것으로 알려졌다. 1960년대 초반 항공 선진국들은 한창 ‘초음속 여객기’ 제작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래서 여객기는 곧 ‘초음속 시대’로 들어가고, 초대형 비행기는 화물기로 쓰이는 경우가 많을 것으로 내다봤던 것이다. 항공 전문가들 중에는 747 개발계획에 들어갈 때부터 “오래 못 갈 공룡 비행기”라 혹평한 사람들도 많았다. 더군다나 보잉은 엄청난 돈을 빌려 에버릿 공장을 짓느라 회사가 휘청거릴 정도였다니. 그래서 “앨런 회장의 도박”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었다.
하지만 도박은 성공했다. 1968년 첫 공개 때 이미 747은 26개 항공사에 예약돼 있었다. 1970~80년대 두 차례 오일쇼크로 대형 항공기 시장이 잠시 줄었지만 일본의 경제성장 덕에 태평양 항로의 점보기 운행이 늘어나 747을 살렸다. 747은 1993년 1000대 판매 기록을 세우며 민항기의 역사를 다시 썼다. 보잉은 2000년대 유럽 항공회사 에어버스의 도전을 받기까지 항공기 시장에서 독보적인 존재로 군림했다.
일본항공(JAL) 화물기를 올려다보니...
하지만 ‘대표 항공기’답게 사건사고도 많았다.
2008년 말 현재 747과 관련된 인명피해 사고는 122건이 일어났고, 그중 48건은 기체가 완파됐다. 이들 사고로 총 2850명이 숨졌다. 납치된 것이 35차례에, 882명이 희생됐다. 최악의 참사로 기록된 것은 1983년 옛소련에 의한 대한항공기 격추사건이다. 로널드 레이건 당시 미국 대통령이 군사용도로 개발된 위성위치추적시스템(GPS)을 민간용도로 활용할 수 있도록 허가한 계기가 됐다. 미국에서는 TWA항공의 747-100 여객기가 96년 7월 공중폭발, 사고원인을 놓고 10년간 공방이 벌어지기도 했다.
최신 버전은 747-400으로 최대 524명이 탑승할 수 있고, 마하(음속) 0.85(시속 약 913km)를 낼 수 있다. 초음속 비행기로 유명했던 콩코드가 퇴출된 뒤로는 이 비행기가 가장 빠른 여객기다. 하지만 몇몇 초창기 기종은 이미 세계 곳곳의 항공박물관으로 들어가는 등 역사의 유물이 됐다.
이 녀석은 미국 조지 W 부시 전대통령을 태우고 다니던 에어포스원. 주문자 요구에 따라 customized 된 747기가 2대가 있다. 그 중 하나가 에어포스원이고, 또 하나는 일본 공군자위대 것. June 16, 2004. (U.S. Air Force photo)
우주왕복선 디스커버리호를 업고 가는 747-100 항공기. 우주왕복선을 기지에서 발사대로 옮길 때에는 점보기를 이용하는데, 이렇게 업고다니는 모양을 보면 왜케 웃긴지. EDWARDS AIR FORCE BASE, Calif. - Space Shuttle Discovery leaves Edwards on the back of a modified Boeing 747. The Aug 19 takeoff marked the first leg of the orbiter's cross-country trek to its home at Kennedy Space Center in Florida. / 19 August 2007
마지막으로, 내년 이후 첫선 보일 747-8급(747-830) 최신형 모델 루프트한자 버전 가상도.
9월30일에 일어난 일들
1901년 영국 발명가 후버트 세실 부스는 전기로 작동하는 진공청소기를 처음으로 특허등록했고
1913년 디젤엔진을 만든 독일 발명가 루돌프 디젤이 죽었고
1921년 데보라 커가 태어났고
1928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유대인 엘리 위젤이 태어났고
1954년 미국의 첫 핵추진 잠수함 노틸러스호가 취역했고
1955년 제임스 딘이 24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고
미국 인종분리법이 개정되면서 첫 ‘흑인대학생’ 제임스 메레디스가 1962년 미시시피 대학에 입학했고
1968년 보잉747이 첫선을 보였고
1985년 ‘리히터 지진계’로 유명한 미국 지질학자 찰스 리히터가 죽었고
이스라엘 핵무기 개발·보유 사실을 폭로한 모데차이 바누누가 1986년 로마에서 이스라엘 측에 납치됐고
1991년 아이티의 장 베르트랑드 아리스티드 대통령이 쿠데타 세력에 축출되면서 ‘아이티 사태’가 시작됐고
2005년 카탈루냐 의회는 “카탈루냐는 국가다”라는 조항을 1조로 하는 자치헌법을 채택, 자치 시대를 열었고
같은 날 덴마크 우익신문 율란츠-포스텐에 무하마드를 모욕적으로 묘사한 만평이 실려 ‘무하마드 만평 파문’이 촉발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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