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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윌버 라이트와 오빌 라이트 형제는 1903년 비행기를 공중에 띄우는 데에 처음으로 성공했고, 찰스 린드버그는 1927년 ‘스피릿 오브 세인트루이스호’를 타고 미국 뉴욕과 프랑스 파리 간 대서양 무착륙 단독비행에 처음으로 성공했다. 옛소련의 유리 가가린은 61년 최초로 우주선을 타고 지구 궤도를 돌았지만 7년 뒤 비행기 사고로 숨을 거뒀다. 미국 우주비행사 닐 암스트롱은 가가린이 죽은 이듬해 아폴로11호를 타고 달에 착륙, 외계 천체에 첫발을 디딘 외국인이 됐다.
우주항공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또 한 명 있다. 47년 ‘마하(음속)의 벽’을 깬 찰스 엘우드 '척' 예거다.
예거는 그 해 10월 14일 오전 10시 29분 벨 사가 제작한 X1 비행기를 타고 미 서부 모하비 사막의 에드워드 공군기지를 출발했다. 2차 대전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이 당시에 미국과 소련은 이미 항공기술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2차 대전은 공중전과 공습이 승패를 가른 최초의 전쟁이었다. ‘하늘을 지배하는 자’가 세상을 지배할 것임을 전쟁이 명확히 보여주었던 것이다.
냉전이라는 냉혹한 현실에 라이트 형제의 하늘을 향한 꿈이 덧씌워져 항공기 속도경쟁에는 갈수록 불이 붙었다. 제트엔진은 꿈이자 시험대였다. 전쟁 중 개발된 제트엔진으로 속도가 올라갔지만 공기저항도 커져 비행기 폭발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인간이 마하의 벽을 깰 수 있느냐 없느냐를 놓고 논쟁을 벌였다.
예거의 X1은 그 자체로는 음속을 돌파할 추진력을 낼 수 없었기 때문에 B29 폭격기에 매달려 이륙한 뒤 지상 3.7㎞ 상공에서 분리했다. 마침내 14.7㎞까지 상승한 순간 X1의 속도는 마하 1.05를 기록했다. 표준대기라고 부르는 15℃ 대기에서의 초속 340m를 마하1로 보고 이보다 빠른 속도를 초음속이라 부른다.
이미 전쟁 중이던 45년 독일 공군이 Me-262A기로 음속을 돌파했다고 주장했지만 입증되지 않았기 때문에 인류 최초 초음속 비행의 영광은 예거에게 돌아갔다. 예거는 당시 24세에 불과했지만 이미 2차 대전 때 무스탕 전투기로 유럽전선을 날았던 베테랑이었다. 예거는 X1에 아내 글레니스의 이름을 따 ‘글래머러스 글레니스’라는 이름을 붙였다.
53년 스캇 크로스필드가 마하 2.0을 돌파했고, 그 며칠 뒤 예거는 다시 2.4를 기록하는 등 속도경쟁의 첨병에 섰다. 유독 시력이 좋아 평균적인 성인 정상시력의 두 배를 더 볼 수 있었고 550m 전방의 사슴까지 쏘아맞출 정도였다고 한다. 예거는 베트남전에도 공군 지휘관으로 참전했으며 군 내에서 승승장구했다. 군 말년인 70년대에는 파키스탄에 머물며 우르두어를 배우고 스와트밸리와 K2 상공을 날았다.
97년 초음속비행 50주년 기념일에는 74세의 나이로 ‘글래머러스 글레니스 3호’라 이름붙여진 F-15D 이글을 직접 몰고 초음속 시범을 보여주기도 했다. 2003년 80세에 여배우 빅토리아 단젤로와 재혼, 화제를 뿌렸다.
초음속 돌파 뒤 사람들은 대서양을 두어시간만에 오갈 수 있게 됐다며 기뻐했지만 정작 초음속 항공기는 민항기로서는 인기가 없었다. 영국-프랑스 합작 콩코드 초음속 여객기가 2003년 사고 뒤 운항을 중단한 뒤로 초음속기는 전투기의 영역으로만 남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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