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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년간 분리독립운동을 벌여온 스리랑카 북부 타밀지역 반군들이 결국 무너졌다. 지난해말부터 내전을 끝내겠다며 반군 지역에 대공세를 퍼부었던 마힌다 라자팍세 대통령(64)은 지난 19일 사살된 반군 지도자의 시신을 언론에 공개하며 화려한 승전 선언을 했다.
정부군의 공격으로 초토화된 타밀 지역
저 사람은 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요.
수도 콜롬보에서 마힌다 라자팍세 대통령의 사진을 걸어놓고 '반군 소탕'을 기뻐하는 시민들
내전을 정부군의 승리로 이끈 주역은 마힌다 라자팍세 대통령(오른쪽 아래 사진)과 그 동생인 고타바야 국방장관, 그리고 대통령의 정치자문역 겸 보좌관인 막내 바실 3형제다. 이들은 민간인들의 사상에는 아랑곳 않은 채 전쟁을 밀어붙여 타밀 반군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했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 반군을 초토화한 스리랑카 정부군의 대공세를 전하며 ‘라자팍세 형제의 피묻은 승리’라 보도했다.
이들 3형제는 남부 함반토타주의 상류층 집안 출신이다. 아버지 DA 라자팍세는 국회의원과 농업장관·내각장관을 지낸 유명 정치인이었고, 삼촌 DM 라자팍세도 함반토타주의 지역 정치인이었다. 맏형 마힌다는 콜롬보의 투르스탄대 등에서 공부를 하다가 67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뒤를 이어 정계에 뛰어들었다. 그는 1970년 24세에 국회의원에 당선돼 스리랑카 사상 최연소 의원 기록을 세웠다.
중앙 정계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은 94년 내각장관으로 입각하면서다. 스리랑카 주류 민족인 싱할리족 일원인 마힌다는 평소에도 전통 의상과 사롱(남아시아 남성들이 입는 긴 웃옷)을 입고 다니는 싱할리 민족주의자다.
애당초 콜롬보가 아닌 싱할리 민족주의 강세 지역에 기반을 두고 성장한 마힌다는 싱할리 정체성을 내세워 정치적 성공을 거뒀다. 싱할리 지배에 반대하는 타밀족에 대한 탄압을 주장해 인기를 얻어 2004년4월부터 총리를 지냈고, 이듬해 대선에서 6년 임기의 대통령에 당선돼 권력을 잡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집권에 기여한 것은 타밀 반군의 전술적 실패였다. 타밀 분리운동 진영은 2005년11월 대선에서 보이콧을 주장해, 결과적으로 마힌다의 승리를 돕고 말았다.
스리랑카에서 타밀족에 대한 차별과 탄압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세계은행 자문위원으로 일한 미국 경제학자 윌리엄 이스털리는 70년대 싱할리족 중심의 스리랑카 정부가 ‘마하웰리 프로젝트’라는 대규모 관개·전력생산 계획을 추진하면서 어떻게 타밀족을 몰아냈는지 고발한 바 있다.
싱할리족 정부는 세계은행과 서방국들로부터 원조를 막대한 원조를 끌어들인 뒤 싱할리족 지역에만 이익이 돌아가도록 일을 꾸몄다. 지난 수십년 간 타밀족 지역에서 원조자금이 사용된 적은 거의 없었다. 북부 타밀지역에 설치한다고 했던 급수로는 원조금을 받자마자 취소해버렸다. 정부는 타밀족 지역에 싱할리족 농민들을 이주시켜 원주민들을 몰아내기 일쑤였다.
싱할리족 정부가 내부적으로 타밀족을 억압하면서도 그동안 오랜 내전을 ‘끝장’내지 못했던 것은, 이처럼 서방의 원조를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역으로 마힌다 정부가 대공세를 벌일 수 있었던 것은 서방의 눈치를 보지 않은 까닭이다.
과거 집권했던 스리랑카의 정통 엘리트들과 달리 마힌다는 영국식 교육을 받지 않아 상대적으로 ‘서구화’되지 않았고, 서방의 인권기준이나 외교적 마찰 등은 모두 무시할 정도로 강성이었다. 그는 집권 뒤 타밀 반군이 아니더라도 자신에게 반대하는 정치인들은 모두 “적과 손잡은 자들”로 규정해 탄압했다.
오른팔인 고타바야도 비슷한 성향으로 알려졌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컴퓨터회사에서 일한 적도 있다는 고타바야는 누구보다 타밀족 탄압에 앞장서왔다. 반군이 고타바야와 사라스 폰세카 합참의장을 자폭테러로 살해하려 한 적이 있는데, 이 사건을 겪은 고타바야는 더욱 강경해져 타밀족 말살작전에 힘을 기울인 것으로 전해졌다. 2007년6월에는 콜롬보의 빈민지역에 머무르던 타밀족 400명에게 반군과의 내통 혐의를 뒤집어씌워 내쫓았다. 정부의 영향을 받는 대법원조차 이 추방령은 무효라고 판결했다. 고타바야는 타밀 지역에서 활동하는 인권단체들이 반군을 돕고 있다며 축출을 주장하기도 했다.
마힌다는 고타바야가 요구한 대로 반군을 제거하기 위한 전쟁 예산을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집권 뒤 정부군 병력을 거의 두 배로 늘려 16만명으로 증원했으며 2006년부터 육·해·공 전면전 훈련을 집중적으로 벌였다. 반군 축출이 아닌 ‘타밀 지역 초토화’를 목표에 둔 계획이었던 셈이다. 마힌다 정부는 또 자국민들과의 ‘전쟁’을 위해 중국과 파키스탄으로부터 무기를 사들였다.
‘가문의 영광’ 앞에 인권 따위는 없었다. 뉴욕타임스는 “스리랑카 정부군의 승리는 러시아가 90년대 엄청난 경제적·정치적 비용에도 아랑곳 않고 체첸 분리운동을 짓밟아버렸을 때와 비슷하다”고 보도했다.
유엔은 정부군의 타밀 대공세가 시작된 1월 한 달에만 민간인 7000명 이상이 희생된 것으로 보고 있다. 지금까지 26만5000명에 이르는 타밀족이 전쟁으로 초토화된 고향에서 쫓겨나 난민이 됐다. 국제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는 타밀 반군들이 민간인 수만명을 정부군의 공습에 대비해 인간방패로 동원했으며, 정부군은 자국민들의 희생을 아랑곳 않고 민간인 지역에 폭격을 쏟아부었다고 고발했다. 그러니 마힌다 형제가 이끄는 스리랑카 정부가 내전을 끝낸 뒤 타밀족을 끌어안을 수 있을지에 대해 회의적인 시선이 많은 것은 당연하다.
마힌다는 공산반군이나 이슬람 세력을 초토화시키는 인도의 진압작전을 보며 타밀 반군을 소탕할 계획을 세운 것으로 전해졌다. 당초 그는 막내 바실과 함께 인도에 무기 지원을 요청했었다고 한다. 인도 집권 국민회의 당수인 소니아 간디 국회의장은 남편 라지브 간디 전총리를 타밀 반군 계열의 자폭테러범에게 잃었다. 이 때문에 타밀 소탕작전을 인도가 지원해줄 것으로 믿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스리랑카 내전에 개입하기를 꺼려한 인도는 공격용 무기 공급을 거절했다. 그러자 마힌다 형제는 인도의 라이벌인 중국과 파키스탄에 손을 내밀었다.
영국 일간 텔레그라프에 따르면 중국은 2년 전 마힌다의 고향인 함반토타의 항구 건설에 투자했다. 이는 중국과 마힌다 정부를 밀접하게 해준 계기가 됐다. 일각에선 마힌다 정부가 내전 승리를 뒤에서 도와준 중국에 함반토바를 해군 기지로 내어줄 가능성도 있다고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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