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후드 올메르트 총리, 치피 리브니 외무장관 등 이스라엘의 중도우파 정치인들과 극우파 야당인 리쿠드당의 베냐민 네타냐후 당수 등 여러 인물들이 2월10일 총선을 앞두고 권력투쟁을 벌이고 있지만, 이번 공격의 주역인 ‘바라크의 귀환’은 단연 관심거리다. 바라크는 올메르트, 리브니, 네타냐후 등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한 군·정치 경력을 갖고 있는데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간 엇갈린 관계의 산 증인이기 때문이다.
바라크는 해외에서 온 귀국파 유대인이 아닌 팔레스타인 태생으로, 이스라엘 건국 전인 1942년 영국령 팔레스타인 키부츠에서 태어났다. 그의 인생역정은 이스라엘군의 영웅으로 93년 오슬로 평화협정을 체결한 뒤 암살당한 이츠하크 라빈 전총리와 비슷한 궤적을 그리고 있어, 흔히들 그를 ‘라빈의 적자’라 부른다.
76년 우간다 엔테베공항 항공기 납치범들을 제압한 ‘엔테베 사건’ 당시 라빈이 총지휘를 맡았고 바라크가 일선 진압병력을 지휘했던 일은 유명하다. 바라크는 능력을 인정받는 최정예 군인이었으며, 팔레스타인 쪽에는 암살단 지휘자로 악명을 떨쳤다. 한때는 여장을 하고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간부 암살에 나선 적도 있다. 88년 PLO지도자 아부 지하드를 암살한 배후도 바라크로 알려졌다. 뮌헨 테러 주범인 ‘검은 9월단‘을 궤멸시킨 ‘바요넷 작전’을 총감독한 것도 바라크였다.
군 합참의장을 거쳐 정치인으로 변신한 바라크는 내무장관, 외무장관, 크네셋(의회) 의원을 지내고 96년 노동당 당수가 됐다. 전쟁영웅 라빈이 팔레스타인과의 평화협상을 주도해 노벨평화상을 받았던 것처럼, 바라크도 정치인이 된 이후에는 팔레스타인과의 ‘공존’에 무게를 실었다. 오슬로협정에도 실무자로서 깊이 관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강경정책을 일삼아 비난받았던 네타냐후 우파정권이 실각한 뒤 99년 총리가 됐지만, 강경파 야당지도자였던 샤론의 도발로 팔레스타인 인티파다(봉기)와 유혈사태가 재연되면서 궁지에 몰렸다. 결국 이듬해 총선에서 샤론의 리쿠드당에 패한 뒤 정치에서 손 떼고 미국으로 떠났다.
바라크는 샤론이 리쿠드에서 떨어져나와 카디마당을 만들자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와 연정에 합류했다. 이스라엘 역사를 주도해온 ‘좌파 시오니즘’의 본산인 노동당은 근래 정치의 우경화가 진행되면서 카디마, 리쿠드 등의 우익정당에 다소 뒤쳐지는 추세다.
바라크는 노동당에 남아있는 사실상 유일한 정치지도자이지만 당을 완전히 장악하지는 못하고 있다. 지도력의 핸디캡을 안고있는 그는 이번 전쟁에 정치적 운명을 건 셈이다. 그러나 대규모 살상에 대한 국제적 비난과 이스라엘 내 불안정한 역학관계 등으로 볼 때, 그가 다시한번 정치지도자로 일어설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이스라엘 유력지 하아레츠는 31일 “가자 공세도 올메르트와 바라크가 안고 있는 정치적 어려움을 해결하는 데에는 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다”고 전했다.
'딸기가 보는 세상 > 인샤알라, 중동이슬람'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아레츠에 실린 글- 이스라엘의 양심의 소리 (0) | 2009.01.01 |
---|---|
이스라엘 내홍? (0) | 2009.01.01 |
이스라엘 뜻대로 될까 (0) | 2008.12.30 |
저주받을 이스라엘 (9) | 2008.12.29 |
아프간 미군 증파 (0) | 2008.12.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