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얘기 저런 얘기

스무살과 서른살

딸기21 2000. 10. 31. 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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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전, 오랜만에 대학 동창들을 만났다. 같이 인문대 학생회 일을 하던 친구들인데, 한 친구가 곧 결혼을 한다고 했다. 친구의 결혼을 핑계삼아 오랜만에 신림동 '그날이 오면' 앞에 모였다.
약속시간보다 일찍 도착해서 일단 '그날'에 들러 책 구경을 했다. 사실 얼마전까지만 해도 나는 '이왕이면' 그날에 가서 책을 사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었다. 교보같은 대형서점에서 책을 사는 건 '그날'에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그러나 물론 요즘은 알라딘에서 책을 산다. 이유는 단 하나, 싸기 때문에. 덕택에 책 구경하는 재미는 많이 줄었다.

책 구경을 하고 나서 혼자 커피숍에 앉아 커피를 마셨다. 신림동 녹두거리 맨 앞에 있는 커피숍인데 스파게티와 케이크를 같이 파는, '세련된' 가게였다. 예전에 '회빈루'라는 중국집이 있던 자리다. 회빈루는 워낙 큰 중국집이어서 신입생 환영회같은 단체 술자리가 단골로 벌어지는 곳이었다. 맛은 없었지만 나무 칸막이로 나뉘어진 방들이 많았다.

그 커피숍은 2층에 있는데 창밖으로 신림동 풍경이 빤히 내려다보였다. 대학생들이 많이 지나다니는데, 학생들을 보면서 내가 서른살이라는, 그리고 내 친구들도 서른살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 생각이 드니까 갑자기 궁금해졌다. 스무살과 서른살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외관상으로는 어떻게 다를지가 궁금했다. 만일 내 친구들이 저 길을 지나간다면, 대학생들과 비교해서 어떻게 보일까. 스무살과 마흔살은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확연한 차이가 있겠지만, 과연 스무살과 서른살은 어떻게 다를까.

친구들을 만났다. 2층에서 본 것은 아니고, 서점 앞에서 같은 눈높이로 만났다. 결혼해서 애아빠가 된 한 놈은 살이 많이 쪘고, 곧 결혼한다는 놈은 양복을 입고 왔는데 그럭저럭 잘 어울렸다. 그 애가 양복입은 모습을 본 건 예전 누군가의 결혼식을 제외하면 처음이다. 아마도 이 친구들을(나 자신도 포함해서) 2층에서 내려다본다면, 대학생들과 비교해서 '늙었다'라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많이 다르니까. 나이가 들어 보이니까.

대학교 때 '나이 서른에 우린'이라는 노래가 한동안 유행했었다. 다분히 감상적이고 '어린 애들이나 부를 것 같은' 가사여서 난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나이 서른에 우린 어디에 있을까, 어느 곳에 어떤 얼굴로 서 있을까
저 거친 들녘에 피어난 고운 나리꽃의 향기를 나이 서른에 우린 기억할 수 있을까..."
그런 가사의 노래였다.
거친 들녘이니 고운 나리꽃의 향기니 하는 낯뜨거운 유치한 표현들이 싫었고, '마흔이면 몰라도 서른이래봤자 뭐가 그리 크게 변하겠느냐' 하는게 내 소감이었다.

얼마전 자사주 매입으로 수억원대의 자산가가 됐다고 소문이 짜했던 한 친구는 주가폭락으로 빚쟁이가 됐다고 했다. 엄살인지 진짜인지 모르지만, 그 애가 억대 부자가 되든 빚쟁이가 되든 사실 우리와 그 애의 관계는 달라질 게 없다. 아.직.까.지.는. 영원히 그랬으면 좋겠다.

난 '서른살 증후군'을 늦게 앓는 모양이다.
우리 나이로 치면 난 올초부터 이미 서른이었는데 이제서야 서른 느낌이 무겁게 다가온다고나 할까.
실은 생각을 별로 안 해봤었다. 남들이 몇 살이냐고 물어보면, 스물 몇과 서른살은 어감이 다르다고는 느꼈었지만 '꺾어진 육십'이라는 나이에 대해서 별 감흥이 없었다.

스무살 때의 나(우리)와 서른살이 된 나(우리)는 많이 달라진 것 같다.
어찌 보면 별반 달라진 것이 없는 것도 같은데, 또 다르게 보면 내가 '나이 서른에 우린' 노래를 들으면서 예상했던 것보다는 훨씬 많이 달라진 것 같다.
물론 난 달라지는 것을 겁먹거나 싫어할 만큼 뭔가 지켜야할 것이 있는 사람도 아니고, 과거의 가치를 곱씹으면 반성할 만큼 성실한 사람도 아니다. 또 현재의 '달라진 모습'에 환멸을 느낄만큼 나이를 많이 먹은 것도 아니고, 현실을 부정적으로 보지도 않는다. 다만 나는 서른살이라는 나이를, 서른살이 되는 해를 예년보다는 그래도 조금 나은 해로 만들고 싶었다. 인생의 방향을 더 많이 보고, 더 어른스럽고 침착해지고, 더 많은 것을 느끼는 그런 해로 만들었으면 싶었는데 결과는, 글쎄.

많은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싶다. 나보다 먼저 서른살을 맞은, 혹은 서른살을 '넘긴' 사람들에게 묻고 싶은 것은 서른살이 인생에서 과연 특별한 의미를 갖는 분기점이 되느냐 하는 것. 또 '서른살에 당신은 무얼 했습니까'라고 묻고 싶다.
나와 동갑내기인 사람들에게는 올 한 해를 어떻게 보냈는지를 묻고 싶다. 나보다 뒤에 서른살을 맞을 사람에게는, '서른살이 어떤 나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묻고 싶다.

2층에서 본 거리는 얼핏 달라진 것이 없어 보였고, 또 재미있어 보이지도 않았다. 천성적으로 '재미주의자'인 나는 아직까지 '서른살의 재미'를 찾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여러가지 묻고 싶은 것들이 생기고, 오리무중의 심정이 되는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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