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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탄불 골든혼(Golden Horn)의 운카파니 다리가 추모객들로 가득차 있다. / 로이터
극우민족주의에 경도된 10대 소년에 살해된 터키 언론인 장례식에 10만명이 운집했다. 20세기 초반 벌어진 `아르메니아 학살'문제로 유럽과 과거사를 둘러싼 싸움을 벌이고 있는 터키가 이번 언론인 피살사건을 계기로 해서 다시한번 시험대에 올랐다.
로이터, AFP통신 등은 23일 이스탄불에서 치러진 언론인 흐란트 딩크의 장례식에 아르메니아계를 비롯한 추모인파 10만명이 몰려 거대한 행렬을 이루었다고 보도했다. CNN 투르크 방송 등은 이스탄불 시가를 가득 메운 추모행렬의 검은 물결을 집중적으로 방송했다. 곳곳에서 평화와 화해와 추모의 메시지를 담은 흰 비둘기들이 날아올랐고, 시가지에는 장중한 음악이 흘러 이스탄불 전체가 장례식장 분위기에 휩싸였다고 현지 언론들은 전했다.
딩크가 일했던 아고스 신문사 건물앞에 모여든 추모객들은 눈물을 흘리며 "우리는 모두 딩크다""우리는 모두 아르메니아인들이다"라고 외쳤다. 아르메니아계인 딩크는 1915∼17년 오스만투르크 제국군대가 아르메니아인들을 학살한 것을 비판하며 진상규명을 주장해온 언론인이다. 그는 지난 19일 저녁 아고스 건물 앞에서 17세 소년 오군 사마스트의 총에 맞아 숨졌다. 이틀뒤 경찰에 체포된 사마스트는 "딩크가 터키민족을 모욕했기 때문에 죽였다"고 말해 충격을 안겨줬다. 딩크의 장례식은 평화롭게 치러졌으나, 터키 정부는 추모 움직임이 자칫 소수민족의 시위로 이어지거나 극우파들의 난동으로 인한 폭력사태가 일어날까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무스타파 케말이 일으킨 청년투르크 혁명으로 근대적인 공화국이 성립된지 80여년이 지났지만 터키는 민주주의와 전근대적 봉건주의, 세속주의와 이슬람 근본주의 사이를 오가고 있다. 동양이 아닌 유럽, 이슬람과 민족주의 대신 서구식 입헌민주주의를 택했으나 내부 갈등은 여전하다.
유럽연합(EU)은 지난해말 정상회담에서 터키에 당분간 문호를 닫기로 결정했다. 명분은 터키가 언론, 출판의 자유 등 자국 내 민주적 요구들을 탄압하고 그리스와의 분쟁 원인이 됐던 키프러스 문제 해결에 나서지 않고 있다는 것, 아르메니아인 학살을 인정치 않고 있다는 것 등이었다. 앞서 프랑스는 터키에 아르메니아 학살을 인정할 것을 요구하는 법안까지 만들어 `내정간섭' 논란을 빚기도 했다.
유럽측의 반(反)터키, 반이슬람 움직임과 비례해 터키에서도 반서구, 반유럽 민족주의 정서가 커지고 있다. 그러나 터키 정부는 EU의 무슬림 차별에 항의하면서 정작 자국내 아르메니아인들과 쿠르드 등 소수민족은 탄압하고 있다. 딩크 피살사건은 터키의 민주주의를 다시한번 시험대에 올린 셈이다.
아르메니아인들은 중앙아시아 코카서스에 뿌리를 둔 민족으로 기독교도들이 대부분이다. 20세기 초반만 해도 터키 아나톨리아 동부 일대에 150만∼200만명이 거주했었다. 그러나 그중 100만명 가량은 투르크군에 학살됐으며 생존자들도 대부분 타지역으로 이주했다. 이후 터키 내 아르메니아 인구는 10만명 미만에 머물렀다. 옛소련 지역에 살던 주민들은 아르메니아공화국으로 독립했지만 그 외 지역의 아르메니아인들은 유대인들처럼 20세기 내내 유랑민으로 여기저기 흩어졌다. 그중에는 상업, 금융 등에서 성공을 거둔 사람들이 많아 미국에서는 "유대인 다음의 로비 세력"으로 불리기도 한다.
최근 들어 중앙아시아 옛소련권 아르메니아인들 중 일자리를 찾아 터키로 들어오는 이들이 많아져 터키 내 갈등요인이 되고 있다. 터키 인권단체들은 2000년대 들어 4만∼5만명의 아르메니아인들이 터키에 이주해온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터키인들은 유럽에 노동자로 이주해가 하층민이 되고 미움을 받고, 아르메니아를 비롯한 중앙아시아 사람들은 터키로 들어와 2등국민이 된다. 딩크 피살사건은 과거사를 둘러싼 싸움이지만 그 속에는 노동의 글로벌화라는 현재진행형 시추에이션이 깔려 있는 셈이다.
로이터, AFP통신 등은 23일 이스탄불에서 치러진 언론인 흐란트 딩크의 장례식에 아르메니아계를 비롯한 추모인파 10만명이 몰려 거대한 행렬을 이루었다고 보도했다. CNN 투르크 방송 등은 이스탄불 시가를 가득 메운 추모행렬의 검은 물결을 집중적으로 방송했다. 곳곳에서 평화와 화해와 추모의 메시지를 담은 흰 비둘기들이 날아올랐고, 시가지에는 장중한 음악이 흘러 이스탄불 전체가 장례식장 분위기에 휩싸였다고 현지 언론들은 전했다.
딩크가 일했던 아고스 신문사 건물앞에 모여든 추모객들은 눈물을 흘리며 "우리는 모두 딩크다""우리는 모두 아르메니아인들이다"라고 외쳤다. 아르메니아계인 딩크는 1915∼17년 오스만투르크 제국군대가 아르메니아인들을 학살한 것을 비판하며 진상규명을 주장해온 언론인이다. 그는 지난 19일 저녁 아고스 건물 앞에서 17세 소년 오군 사마스트의 총에 맞아 숨졌다. 이틀뒤 경찰에 체포된 사마스트는 "딩크가 터키민족을 모욕했기 때문에 죽였다"고 말해 충격을 안겨줬다. 딩크의 장례식은 평화롭게 치러졌으나, 터키 정부는 추모 움직임이 자칫 소수민족의 시위로 이어지거나 극우파들의 난동으로 인한 폭력사태가 일어날까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무스타파 케말이 일으킨 청년투르크 혁명으로 근대적인 공화국이 성립된지 80여년이 지났지만 터키는 민주주의와 전근대적 봉건주의, 세속주의와 이슬람 근본주의 사이를 오가고 있다. 동양이 아닌 유럽, 이슬람과 민족주의 대신 서구식 입헌민주주의를 택했으나 내부 갈등은 여전하다.
유럽연합(EU)은 지난해말 정상회담에서 터키에 당분간 문호를 닫기로 결정했다. 명분은 터키가 언론, 출판의 자유 등 자국 내 민주적 요구들을 탄압하고 그리스와의 분쟁 원인이 됐던 키프러스 문제 해결에 나서지 않고 있다는 것, 아르메니아인 학살을 인정치 않고 있다는 것 등이었다. 앞서 프랑스는 터키에 아르메니아 학살을 인정할 것을 요구하는 법안까지 만들어 `내정간섭' 논란을 빚기도 했다.
유럽측의 반(反)터키, 반이슬람 움직임과 비례해 터키에서도 반서구, 반유럽 민족주의 정서가 커지고 있다. 그러나 터키 정부는 EU의 무슬림 차별에 항의하면서 정작 자국내 아르메니아인들과 쿠르드 등 소수민족은 탄압하고 있다. 딩크 피살사건은 터키의 민주주의를 다시한번 시험대에 올린 셈이다.
아르메니아인들은 중앙아시아 코카서스에 뿌리를 둔 민족으로 기독교도들이 대부분이다. 20세기 초반만 해도 터키 아나톨리아 동부 일대에 150만∼200만명이 거주했었다. 그러나 그중 100만명 가량은 투르크군에 학살됐으며 생존자들도 대부분 타지역으로 이주했다. 이후 터키 내 아르메니아 인구는 10만명 미만에 머물렀다. 옛소련 지역에 살던 주민들은 아르메니아공화국으로 독립했지만 그 외 지역의 아르메니아인들은 유대인들처럼 20세기 내내 유랑민으로 여기저기 흩어졌다. 그중에는 상업, 금융 등에서 성공을 거둔 사람들이 많아 미국에서는 "유대인 다음의 로비 세력"으로 불리기도 한다.
최근 들어 중앙아시아 옛소련권 아르메니아인들 중 일자리를 찾아 터키로 들어오는 이들이 많아져 터키 내 갈등요인이 되고 있다. 터키 인권단체들은 2000년대 들어 4만∼5만명의 아르메니아인들이 터키에 이주해온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터키인들은 유럽에 노동자로 이주해가 하층민이 되고 미움을 받고, 아르메니아를 비롯한 중앙아시아 사람들은 터키로 들어와 2등국민이 된다. 딩크 피살사건은 과거사를 둘러싼 싸움이지만 그 속에는 노동의 글로벌화라는 현재진행형 시추에이션이 깔려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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