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에서 나치즘을 연상케하는 극우 민족주의가 부상하면서 인종차별 바람이 불고 있다. 옛 소련 해체 이후 기승을 부렸던 배타적인 민족주의에 크렘린의 정치적 계산이 겹쳐져 소수민족, 유색인종을 겨냥한 차별과 공격이 빈발하고 있는 것.
미국 크리스천사이언스모니터(CSM)는 10일 러시아 정부가 국민들의 정치적, 경제적 불만을 희석시키기 위해 인종차별 감정을 부추기고 있다며 이민노동자 축출 등으로 이어지는 극우파들의 움직임을 우려하는 기사를 실었다.
알렉산더 벨로프는 모스크바에서 활동하는 인종주의 행동단체 `불법이주반대운동'(DPNI)을 이끌고 있다. 주로 반(反)이민 거리시위 등에 집중하고 있는 DPNI 같은 단체의 활동이 러시아에서는 과격 일탈이 아닌 하나의 정치적 흐름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불법 이주 반대'라는 슬로건을 내걸었지만 실제 이들의 행동은 배타적인 러시아 제일주의, 인종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런 움직임은 소수민족들에게서 정치·경제적 불만의 희생양을 찾는 현상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얼마 전 출간된 벨로프의 저서에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에 대한 극찬이 나와 눈길을 끌었다. 러시아는 옛 소련에서 독립한 뒤 친서방 노선을 걷고 있는 그루지야와 갈등을 빚고 있는데, 푸틴 대통령은 최근 그루지야계의 러시아 내 기업 활동을 금지시키는 조치를 취한 바 있다. 독일 나치 만행 피해자 추모단체인 ‘러시아홀로코스트기금’의 알라 게르베르 회장은 "푸틴과 벨로프가 말하는 내용은 완전히 똑같다"며 "러시아는 러시아인들을 위한 국가라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라고 말했다.
DPNI 같은 인종주의 그룹은 모스크바에서 점점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쪽에서는 DPNI이 크렘린의 배후 조종 혹은 지원을 받는 것으로까지 의심하고 있다.
외신들은 러시아 곳곳에서 최근 소수민족을 핍박하고 공격하는 일들이 잦아졌다고 전한다. 지난 8월 북부 콘도포가 지역에서는 엿새 동안 소요가 일어나 3명이 숨졌다. 주민 다수를 차지하는 러시아계와 아시아계 주민들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 아시아계 주민 수백명이 다른 지역으로 대피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
지난 6개월 동안 사라토프, 치타, 로스토프, 아스트라칸, 이르쿠츠크 등에서 잇달아 비슷한 사건들이 일어났다. 한 조사에서는 러시아인들 57%가 "콘도포가 사건과 같은 일이 내가 거주하는 곳에서 일어날 수 있다"고 예상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다른 조사에서는 52%가 "러시아는 러시아인들의 나라이므로 비(非)러시아계 주민들을 제한해야 한다"고 응답했다.
증오범죄 문제를 다루는 시민단체 소바센터의 갈리나 코체프니코바는 CSM 인터뷰에서 "콘도포가 사건 같은 사회적 폭발 조짐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며 "대다수 사람들은 아직 문제의 심각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지만 이미 소수민족에 대한 차별과 폭력이 통제 가능한 수준을 넘어서고 있다"고 말했다. 코체프니코바는 특히 러시아 정부가 대중들의 인종차별 정서를 교묘하게 이용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푸틴 정부는 체첸 등 러시아 내 소수민족을 억압하고 언론, 출판 등 정치적 자유를 교묘하게 탄압, 서방국가들의 지탄을 받고 있다. 그러면서 민주주의에 대한 욕구를 다른 곳으로 돌리는 수단으로 DPNI 같은 우익단체들을 이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대로 가다가는 인종주의가 푸틴 정부마저 통제할 수 없는 수준으로 확대돼 유혈폭력사태가 일어날 우려가 있다고 그는 말했다.
이달초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가 옛 소련 지역 중앙아시아와 코카서스 지방, 러시아 남부 자치공화국 등에서 쏟아져들어온 범죄자들 때문에 테러소굴이 되고 있다"면서 "그들로부터 러시아 원주민 인구를 지키고 러시아의 산업적 이익을 보호해야 한다"고 말했다. 우익단체들의 주장과 매한가지다. 푸틴 대통령 발언 직후 모스크바 경찰은 시내 카지노, 식당, 중소기업 등 그루지야계 사업체 여러곳을 압수수색하고 문 닫게 했다. 지난 6일에는 그루지야 정부가 러시아 군장교들을 스파이 혐의로 체포한데 대한 보복으로 그루지야계 `불법 노동자' 150명을 체포, 돌려보냈다. 교육당국은 공립학교 학생들 중 그루지야계 이름을 가진 아이들의 명단을 작성토록 일선 학교들에 지시했다.
이 조치 이후 이미 러시아 시민권을 취득해 살고 있는 외국계 주민들 사이에서도 공포와 우려가 확산되고 있다. 작가 보리스 아쿠닌은 "검은 머리를 갖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더이상 러시아에선 안전하지 않다"면서 "러시아가 인종혐오의 바이러스에 감염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독일을 방문한 푸틴 대통령
■ '여기자 피살' 파장 속, 푸틴의 독일 방문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10일 독일을 방문했다. 러시아산 천연가스 등 에너지 공급협상 때문에 독일을 찾았지만 정작 푸틴 대통령의 발목을 잡은 것은 최근 모스크바에서 발생한 여성 언론인 피살사건이었다.
옛 동독지역의 유서깊은 도시 드레스덴에서 푸틴 대통령을 맞은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최근 청부살인자들에게 피살된 저널리스트 안나 폴리트코프스카야 사건을 거론하면서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증거"라고 푸틴 대통령의 언론 자유 제한을 대놓고 비판했다. 정상회담에 앞선 기자회견에서도 이 문제에 대한 질문들이 쏟아졌다. 러시아군의 체첸인 학살 등을 비판해왔던 폴리트코프스카야는 지난 7일 자기 아파트에서 총격을 받고 살해된채 발견됐다. 10일 치러진 장례식에는 모스크바 시민 수천명이 모여 눈물바다를 이뤘다. 폴리트코프스카야가 일했던 신문 노바야가제타 측은 당국의 수사 의지를 못 믿겠다면서 2500만 루블(약 9억2000만원)의 현상금까지 독자적으로 내걸었다.
푸틴대통령은 당국의 미온적인 대응에 대한 비판을 의식한 듯 "끔찍한 범죄에 대해서는 반드시 처벌할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폴리트코프스카야는 러시아에서 정치적 영향력이 없는 인물이었다"고 말했다. 또 "전세계에서 반(反)러시아 감정을 불러일으키려는 자들의 소행"이라고 주장했다.
하필 드레스덴은 1980년대 옛 소련 정보국(KGB) 지사가 있던 곳으로, KGB 출신인 푸틴대통령이 1980년대 근무했던 곳이기도 하다. 이번 회담을 둘러싸고 독일인들은 동독을 쥐락펴락했던 KGB와 푸틴 대통령의 과거를 연상하지 않을 수 없는 미묘한 상황이 연출됐다고 AFP통신 등 외신들은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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