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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의 엘리트들은 왜 나라를 버리지 않는가

딸기21 2006. 6. 28.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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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의 많은 엘리트들은 어째서 도망치지 않고 있는가."


이라크에서 종파 갈등과 알카에다 등 테러조직의 폭력으로 유혈사태가 끊이지 않고 있지만, 공포와 긴장 속에 굳건히 자리를 지키려 애쓰는 이들도 많다. 폭력 피해를 겁낸 이들의 국외 탈출 행렬이 이어지는 가운데에서도 `조국의 재건을 위해' 바그다드를 지키는 지식인들의 스토리가 27일 미국 크리스천사이언스모니터에 실렸다.


새 국가 출범과 함께 구성된 형사재판소장을 지낸 주하이르 알 말리키(사진)는 협박에 시달리면서 바그다드를 떠나지 않고 있는 사람 중 하나다. 미국이 지원하는 새 정부에 참여하기로 한 뒤 그의 집에는 그를 `배신자'라 비난하는 협박 전화와 살해 위협이 끊이지 않았다.

사담 후세인 정권이 무너진 뒤 진정한 법치가 실현되기를 원했던 말리키가 맞부딪친 현실은 더 복잡했다. 정작 그를 괴롭힌 것은 미국, 새 정부와의 갈등이었다. 지난해 그는 미국이 이라크전 직후 내세웠던 친미파 정치인 아메드 찰라비의 부패 혐의에 대한 재판을 맡아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국가 재건자금을 횡령한 찰라비에 대한 재판은 그러나 사방의 압력 때문에 공정하게 진행될 수가 없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들의 살해 위협 속에 말리키는 공직을 그만뒀고, 나라를 뜨기 위해 유럽에 일자리를 구했다. 비자까지 받아놓고 짐을 챙겼는데 이웃들이 그를 잡았다. "우리가 당신의 보디가드가 되어줄테니 이곳을 떠나지 말라"는 만류에 그는 결국 마음을 바꿨다. 그는 "이 위험한 곳에 남기로 한 내가 제정신은 아니었던 것 같다"면서도 "하지만 나는 여전히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만일 내가 떠나고 다른 이들도 떠나면 대체 이곳엔 누가 남겠는가." 말리키는 올들어서부터는 세제 개혁과 군사법령 정비 작업에 참여하고 있다.


의사인 압둘라는 가족들을 외국에 피신시키고 혼자 바그다드에 남아 진료를 하고 의대에서 강의를 한다. 가족들과 함께 도망치고 싶었지만, 외국에 나가면 이라크의 상황이 떠올라 오히려 참을 수 없다. 그래서 위험을 무릅쓰고 병원을 지킨다. 이유도 모른채 그저 죽고 죽이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지만 이 혼란이 어서 끝나기를 바랄 뿐이다.

그가 느끼는 공포는 총구보다 더 근원적인 것에서 나온다. 전후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들이 득세하면서 평범한 이들이 느끼는 압박감이 커지고 있다. 후세인 시절 정치적 억압이 문제였다면 이제는 이슬람 종교세력의 사회문화적 압력이 커지고 있는 것. 그래서 가족들을 외국으로 보냈다. 그는 "지금의 상황은 2003년 후세인 체제 붕괴 뒤 사람들이 가졌던 희망에 대한 거대한 배신"이라고 진단한다. 그러나 그는 내전 때 대거 나라를 떠나버린 레바논인들처럼은 되지 말아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다. (이라크인들을 칭찬하기 위해 레바논인들을 깎아내릴 생각은 없지만, 그리고 레바논인들에 대해 아는 것도 아니지만, 아프리카 유럽 남미 등지에 레바논 부자들이 많은 것이 사실인 모양이다. 두달 전 가나에 갔을 때 아크라 시내의 저택을 보고 뭐하는 곳이냐고 했더니 문지기가 레바논 사람 살림집이라 해서 놀랐었다. 월드컵 때문에 우리와 친해진?? 토고의 경우 인구의 1% 좀 못미치는 숫자가 레바니스들이다)


물론 이라크에서도 상황이 심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2003년 말리키와 함께 일했던 동료 변호사 20명 중 현재 바그다드에는 2명만 남았다. 4명은 살해됐고, 나머지는 국외로 탈출하거나 지방으로 떠났다. 말리키는 "다들 돌아오고 싶어하지만 여기 상황이 나아지려면 5년은 걸릴 것"이라고 내다봤다.

사담 후세인의 변호를 맡았던 카미스 알 우바이디는 조국을 지키는 길을 택했다가 결국 목숨을 잃었다. 지난해 후세인 변호사로 선임된 뒤 그는 CSM 인터뷰에서 "범죄 혐의를 받는 사람을 변호하는 것이 내 직업"이라며 "내 생명은 신의 손에 맡기기로 했다"고 말했었다. "국가를 재건하기 위해 지식과 경험이 어느 때보다도 필요한 시기"라면서 엑소더스 행렬에 끼기를 거부한 것. 이후 그의 집 앞에 세워둔 자가용 승용차가 폭파되고 총격을 받는 등 살해 위협이 반복되더니 결국 그는 집 앞에서 살해됐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한 교수의 사연도 소개됐다. 올해 58세가 된 이 교수의 형제들은 걸프 국가에서 뉴질랜드까지, 다양한 나라로 이민가 살고 있다. "형제들은 늘 내게 왜 떠나지 않느냐고 묻는다." 최근 시아파 아버지와 수니파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한 청년이 종파 갈등 와중에 애꿎게 무장괴한들에게 살해됐다. 교수 아들의 친구인 그 청년은 촉망받는 엔지니어였다. 청년의 장례식에 참석하고 돌아온 교수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미국인들이 우리를 `해방'시키러 왔다고 했는데, 이런 상황을 상상이나 해봤느냐"고 미국인 기자에게 반문했다. 친구를 잃은 아들은 교수에게 나라를 떠나자고 했지만 그는 `떠나지 못할 이유'가 남아있다며 "내 나라를 위해 봉사하면서, 여기서 살아남아야 한다"고 말했다.


배운 이들이 모두 떠나면 전쟁이 끝나 국가를 다시 세우려 해도 `머리'가 없어 재건 작업이 힘겨워진다. 시에라리온, 라이베리아 등 격렬한 내전을 겪은 아프리카 국가들이 바로 그런 `두뇌 고갈(brain drain)' 때문에 험로를 걷고 있다. 이라크는 말리키나 압둘라 같은 지식인들이 아직 많이 남아있다는 점에서 희망이 있는 셈이다.

옛부터 아랍에서는 "이집트 사람이 책을 쓰면 레바논에서 출판해 이라크 사람들이 읽는다"고 한다. 이라크는 영국 식민지 시절부터 교육열이 높았던 지역이고, 한때 박사학위 소지자 비율이 세계 최고를 기록하기도 했던 나라다. 이라크의 지식인 엘리트층은 사담 후세인의 폭정을 거치며 숨죽이며 살다가 또다시 전쟁의 참화를 겪었지만 극심한 전쟁 후유증을 고통스럽게 견뎌내고 있다고 신문은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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